2025.4.21. (月曜日, 111th/365) “선종善終”(In memoriam Pope Francis (1936-2025))
- Chulhyun Bae
- 3시간 전
- 2분 분량
2025.4.21. (月曜日, 111th/365) “선종善終”
(In memoriam Pope Francis (1936-2025))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善終하셨다. 인간이라면, 아니 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안다. 자신이 잠시 살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는 이 시간은 빅뱅이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기에 그 지나간 세월이 아무리 장구하더라고,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순간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죽는 다른 사실을 알고 지금을 살려는 각성한 인간은 짧은 인생을 영원한 예술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런 사람은 최선의 삶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훈련하고 통합하고 창조하여, 자신하고는 다른 삶의 유형을 지니는 자를 다시 볼 뿐만 아니라 존경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유일무이한 임무가 공동체와 인류를 위한 의무로 여기고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부사가 ‘잘’이다. 우리 대부분은 죽지 않기 위해 버둥대가 죽지만, 소수만이 ‘잘 죽기 위해’ 산다. 하루하루가 삶이면서 죽음이고 삶과 죽을 초월하는 최선이다.
우리 시대 어른이 없다. 특히 종교 어른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찾기 힘들다. 그나마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 시대 희망의 별이었다. 그는 그 별을 성서나 교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서 찾았다. 그 양심은 그에게 동방박사들이 추운 겨울에 발견한 별이었다. 그는 그 별을 따라 베들레헴의 허름한 마구간에서 예수를 발견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시대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자를 통해, 예수를 발견하고 경배하는 삶을 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4세기 이탈리아 아시시의 수사 프란체스코처럼 살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라고 붙였다. 그는 자신이 이해 할 수 없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을 다시 보고,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존경尊敬이란 다시re 보고specto, 자신이 발견한 다름을 틀림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인 존경으로 여기는 지성이다. 진정한 존경이란, 존경할 수 없는 대상에서 존경을 찾아내는 발굴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렇게 확장된 생각으로 자신의 인격을 담금질하여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윤리적인 삶을 실천하였다. 윤리란, 확장된 자아를 자신의 습관으로 만들어 상대방이 행복하도록 행동하는 삶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의 경제적인 약자, 사회적인 소외자, 대다수의 삶의 유형과 다른 삶을 사는 LGBT까지도 품어, 그들이 겪는 삶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겼다. 그는 마태가 아니라 누가의 산상수훈을 선호했을 것이다. 마가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가는 ‘가난한 자는 복이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누가는 실제로 돈이 없어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끼니를 살 수 없어 배고프고, 슬퍼 울고, 남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살고 있어 배척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과감하게 선포했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는 마틴 루터의 전통을 이어받아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부르는 천국으로 소환된다고 여겨 ‘소천召天’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사람이 돌아가셨을 때, 선종善終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자신이 달려갈 길을 최선을 다해 경주했을 때, 고요히 사랑하는 친지앞에서 눈을 감을 수 있는 행복을 라틴어로 ‘모르스 보나’mors bona 혹은 ‘모르스 상투스’mors santa라고 부른다. 예수회 중국 선교사 로벨 리가 (Lobelli, 1610-1683)이 중국인들을 위한 한문교리서를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라고 불렀다. 이 책에 선생복종善生福終이 처음 등장하고 줄여 선종善生福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엔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선생善生이란 하루하루를 착하게 사는 것이다. 착하게 사는 것은, 최선을 경주하는 삶이다.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말한 것처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문장이다. 하루라는 시간이 마련해준 여기에서 최선을 경주하는 것은 생사를 초월한 복이다. 그러기에 마지막 순간에 잘 눈을 감을 수 있다. 그런 하루가 오롯이 모여 바른 길이 될 것이다. 그의 환한 웃음이 벌써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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