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21. (月曜日, 111th/365) “당신은 성흔을 지니고 있습니까?”(In memoriam Pope Francis (1936-2025))
- Chulhyun Bae
- 3시간 전
- 4분 분량
2025.4.21. (月曜日, 111th/365) “당신은 성흔을 지니고 있습니까?”
(In memoriam Pope Francis (1936-2025))
사랑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가장 내면적인 것이 외면으로 드러나는가? 기원전 6세기 소아시아 에베소 철학자 헤라클리투스는 ‘습관이 인간에게 운명이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습관이란 한 사람이 자주 생각하는 것이 드러나는 언행이며, 그 언행은 그 사람의 개성이 되어 표정, 걸음걸이, 동작이 된다. 카라바조는 13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성인인 성 프란체스코의 그림을 사랑의 기적을 독특한 방식으로 그렸다.
카바라조가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1595년이다. 그가 고향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거주하기 시작한 해였다. 그는 어머니 친척으로 도움으로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라는 유력한 추기경의 집에 입주한 화가가 되었다. 그는 수년 동안 ‘팔라초 마다마’라고 불리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추기경의 집에 거주하였다.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워, 자신을 주위 사람들에게 “델 몬테의 화가”라고 소개하였다.
그가 팔라초 마다마에서 그런 첫 그림들 중에 하나가 <법열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1595년)이다. 누가 이 그림을 카라바조에게 주문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델 몬테 주교이거나 혹은 당시 로마 한 은행가이며 미술품 수집가인 오타비오 코스타 백작일 가능성이 크다. 코스타 백작은 1605년에 남긴 유언장에 이렇게, 이 그림의 단서가 되는 글을 남겼다: “카라바조의 <성 프란체스코> 그림은 네 개의 종려나무 이파리로 장식되어있다.” 코스타 백작은 이 그림을 델 몬테 주교에서 희사하였고, 그 후 이 그림은 <악사들>과 같은 카라바조의 초기 작품들과 함께 팔라초 마다마에 걸려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이 지난 400년동안 알 수 없는 행방을 거쳐, 지금은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 있는 워즈워스 아테네움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혁명적인 화풍인이며 특징인 강력한 ‘테네브리즘’, 즉 명암대비화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검고 짙은 갈색으로 배경 처리하여,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을, 마치 무대 위 조명 스폿라이트를 받은 인물처럼 묘사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카라바조의 가톨릭 신앙을 표현한 작품이다. 로마 가톨릭은 독일과 프랑스를 휩쓸고 있었던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맞서는 가톨릭 자체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있었다. 카라바조는 성 프란체스코만큼 가톨릭 신앙을 정수를 보여줄 인물은 없다고 판단하였다.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의 종교개혁운동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모델은 성 프란체스코였다.
그는 13세기 아시시에 살았던 수사였다. 당시 가톨릭 종교개혁은 현학적이며 복잡한 신학적 논쟁 혹은 정교한 의례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인물과 형식을 취해야만 했다. 그가 바로 성 프란체스코였다. 그의 설교는 지식인들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였다. 그에게 자연은 신의 영성이 깃든 복된 창조물이다. 다만 인간의 욕심으로 자연이 오염되고 훼손되었을 뿐이다. 그는 태양을 신의 형제로, 달을 신의 자매로, 바람, 물, 불, 흙을 신의 형제로 여기고 감사를 드렸다.
한 기록에 따르면, 프란치스코가 몇몇 동료들과 함께 여행하던 중, 길가의 나무들 양쪽에 새들이 가득 차 있는 곳을 우연히 발견하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내가 새들에게 설교하러 가는 동안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놀랍게도 새들은 그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그를 에워쌌고, 한 마리도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종 손에 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의 작은 동생들인 새들아! 너희들은 창조주 하느님의 많은 은총을 입었구나. 너희는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는 하느님을 찬양해야 한다. 하느님이 너희들에게 사방을 날 수 있는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실을 잣지도 꿰매지도 않지만, 하느님은 너희들에게 두겹과 세겹의 날개를 주셨구나.”
프란체스코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학적 논쟁이나 말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행위를 통한 수련이었다. 그는 신앙은 언행을 통해 연습할 때, 비로소 형성되는 구별된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는 골방에 들어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기도를 올렸고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육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삼베옷을 입고 재를 몸에 뿌리고 십자가 처형을 위해 골고다로 올라가는 수치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프란체스코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리스도의 고통이 그의 몸에 새겨진 소위 ‘성흔聖痕’의 사건이다. 성흔이라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못이 박힌 좌우손발과 이 과정을 지휘한 로마 백부장 롱기누스의 창에 찔린 옆구리 등 모두 다섯 가지 상처를 의미한다. 성흔현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처형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한 13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종교적인 법열 상태에 빠진 종교인들의 신체에 등장한 현상이다.
당시 프란체스코의 성흔을 그리는 방식의 기준을 정한 화가는 조토였다. 근엄한 프란체스코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못박히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를 양손바닥으로 받는 모습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알베르노 산에서 기도하는 동안 하늘에서 천사의 모습으로 유영하는 예수에게서 성흔을 받고 있다.
카라바조는 이 성흔 장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렸다. 그는 13세 후반 신학자인 성 보나벤투라는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라는 책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 그는 이 성흔의 기적을 기록하였다. 1226년 10월 3일,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후, 형제회는 그의 서거를 이렇게 알렸다. “저는 여러분께 큰 기쁨과 새로운 기적을 알립니다. 이는 태초부터 하느님의 아들, 주 그리스도 안에서만 볼 수 있었던 표징입니다. 프란체스코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닮아, 그리스도의 흔적인 다섯 개의 상처를 몸에 지니고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흔적들은 프란체스코가 임종을 앞두고 몸에 남긴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약 2년 전, 외딴 알베르나 산 꼭대기에서 기도하던 중 이 흔적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다른 두 명의 수사와 함께 그곳에 갔는데, 그중 한 명이 레오 형제였습니다. 깊은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여섯 날개를 지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천사가 가다 오자, 프란체스코는 그 날개들 사이에 십자가 처형된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취한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숨겨진 사랑의 실천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프란체스코가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자. 자신의 심장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상처가 자신의 손과 발에 그데로 나타나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카라바조는 성 보나벤투라의 글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극적인 방식으로 그렸다. 자신의 심장에 성흔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카라바조의 프란체스코는 이 순간에 뒤로 기절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피가 샘솟아 나고 있는 상처 위로 가져간다. 그의 손발에는 성흔이 없다. 오직 심장에만 그 상처가 남아있다. 천사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기절한 프란체스코를 껴안고 있는 자비로운 모습이다. 카바라조는 성흔을 받는 순간에 기절하여 누워있는 성인을 그린 첫 번째 화가다.
프란체스코와 천사의 그림은 그리스도교 회화에서 성모 마리아 팔에 안긴 그리스도의 모습과 유사하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당시 프란체스코에 대한 전설은 당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었다. 이 그림은 프란체스코의 성흔 그 이상에 대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과 이웃, 더 나아가 식물고 동물을 사랑하는 자비의 실천이 신을 따르는 신앙인의 유일한 증표다. <황홀경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사상인 사랑이 성인뿐만 아니라 이 그림을 보았던 수많은 16세기 모든 로마인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건이라고 증언한다.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사랑은 신이 창조한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며, 그것은 우리의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양심이자 깨달음이다.
사진
<법열에 빠진 성 프란치스코>
유화, 1595년, 93.9 × 129.5cm
하트포드, 코네티컷, 워즈워스 아테네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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