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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1.(火曜日, 91st/365) “당신은 좌정하고 경청하고 그리고 질문하십니까?”

2025.4.1.(火曜日, 91st/365) “당신은 좌정하고 경청하고 그리고 질문하십니까?”

(교육과 종교 훈련의 삼요소)

     

오늘 아침, 샤갈과 산책 중에 한 유명 정치인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아, 그분의 명복을 빈다. 한편으론 반으로 갈라져, 우리 정치가 국가적인 재난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운명적인 모습을 미리 보는 것같아, 한없이 우울하다. 사회 지도자들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승복합시다라고 독려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충고는 마이동풍일 뿐이다. 우리가 지난 수십년간 승자독식의 교육으로 세뇌되었고, 승자독식을 염원하고 축원하는 종교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우리의 세계관, 그 세계관을 고취하고 정착시킨 교육과 종교에 대한, 완벽한 혁신이 없다면,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그것은 이상적인 이민국가로 건국된 미국도 마찬가지다. 내 생애에 미국의 몰락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볼 줄 몰랐다. 미국에서는 대학 내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강제로 출국당하고 있다. 미국 이민국은 마치 히틀러의 비밀경찰국처럼 합법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뿐만 아니라, 영주권자도 구금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과 반대되는 집회에 학내에서 허용했다고, 컬럼비아 대학, 프린스턴 대학, 하바드 대학 등 유수한 대학의 연구에 지원되는 막대한 지원금을 대통령이 마음대로 중단시킨다. 그것을 막으려는 언론도 없다. 내가 30대 젊은 시절을 온전히 보낸 나라의 침몰을 보면서 어느 때보다 우울하다.

     

어제저녁, 아내와 함께 옻칠 명인 김인영 선생님을 북촌 마을 한 식당에서 만났다. 성난 군중들이 서로를 죽이겠다고 두 편으로 나누어 시위하고 있는 헌법재판소를 지났다.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가 김인영 선생님을 만난 이유는 이렇다. 두 달 전쯤, 강북에 있는 중요한 사찰을 맡고 계신 주지 스님께서 자신이 시무하는 법당을 고요한 선명상의 공간으로 개조하고 싶다는 뜻을 나에게 전달했다. 법당이 불교의 중요한 자기응시와 자기변화의 공간이지만, 수많은 불상이 올려진 제단 구조가 오히려 신자들이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자기분열의 장소로 타락한 지 오래되었다. 그 구태의연한 종교 제단 구조는 성당이나 교회도 마찬가지다.

     

스님은 법당에서 불상을 치우자는 내 의견에 동의하였다. 아마도 부처님도 자신의 형상이 그렇게 앉자 신자들을 보고 있는 모습에 경악했을 것이다. 법당의 중앙에 어떤 형상도 존재하지 않고 옻칠만 일곱 번 칠한 직사각형 작품만 걸어놓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휴스턴에 있는 로크코 채플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곳에 모든 종교와 사상에 열린공간으로 추상표현주의 작가 로스코 작품이 제단에 결려 있다. 나는 선명상을 위해 방문하시는 분이, 온전하게 자기에게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법당 바닥 전체를 거대한 직사각형 옻칠 작품으로 채우자고 제안하였다. 눈으로 보는 불상이 없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불상을 모시려는 이 법당 구조가 대한민국의 불교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확신한다. 5월 5일 개관을 위한 한참 공사 중이다.

     

우리 부부은 수년전 신사동에 더코라 공간을 자기응시의 공간으로 꾸몄다. 이 곳은 앞으로 우리가 건축하기를 꿈꾸는 더코라채플의 원형이었다. 여기에 방문하시는 사람들이 저절로 숙연해지고 옷깃을 여미는 장소를 구현시켰다. 무엇인가 화려하고 멋진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없는 절제의 공간이기에 아우라를 느끼는 장소를 만들었다. 그때 김인영 명장에게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책상 제작을 부탁하였다. 아내는 더코라 수메르 쐐기문자 상징이 들어간 책상을 디자인하고 명장은 나무를 삼베로 둘러싸고 옻칠, 황토, 풀을 혼합하여 7번 칠해 완성하였다. 옻칠 책상 30개와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친환경 의자 40개가 더코라를 채웠다.

     

교육과 종교는 다름 세 가지를 통해, 사람들을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 좌정, 경청, 질문이다. 인간은 때가 되면 신체를 지닌 동물적인 인간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지닌 신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 동물상태에서 신성을 지닌 인간으로 변화해야한다. 이 의례를 유대인들은 ‘유월절過越節’, 영어로는 ‘패스오버’Passover라고 부른다. 패스오버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기 위해 ‘삶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죽음의 경계를 견디고 넘어가다’라는 뜻이다. 그 경계를 넘어가는 이유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터전을 쟁기로 뒤엎고, 자신만의 씨앗을 파종해야한다.

     

<누가복음> 2장에 교육의 삼요소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누가만이 예수의 어린시절 교육에 관해 말한다. 예수가 가족들과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을 준수하러 간 나이가 12세였다. 남아는 12세, 여아는 13세가 삶의 결정인 순간이다. 신체적으로 대뇌大腦)의 좌우기능이 분화하는 소위 뇌의 편재화偏在化 (lateralization)시작되는 시기다. 부모 밑에서 가정교육을 마친 인간이 본격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스승을 찾아가는 본격적인 교육의 시기다. 서양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며, 학생들은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며,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다.

     

모든 유대인들일 예루살렘으로 몰려와 유월절 축제를 지낸 후,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예수의 부모도 친척들과 함께 하룻길을 고향으로 간 후였다. 그들은 예수를 친척가운데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를 찾기 시작한다. 만 삼일 만에, 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이자 학교에서 랍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질문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다음은 <누가복음> 2장 46절이다:

     

“삼일이 흘러갔다. 예수의 부모들은 예수를 성전에서 발견하였다.

랍비들 사이에서 좌정坐定하여

그들의 말을 경청敬聽하고 그들에게 질문質問하고 있었다.”

     

이 구절은 청소년 예수가 성년成年이 되어 성인聖人으로 변모하기 위한 세 가지 징검다리를 알려준다. 첫째는 좌정坐定이고, 둘째는 경청敬聽, 셋째는 질문質問이다.

     

첫 번쩨 원칙은 좌정坐定이다. 좌정은 또 다른 인간의 특권인 보는 것을 포기하는 용기다. 가만히 앉아 두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몰입한다. '정할 정定'자는 앉아서 해야 하는 임무를 알려준다. 이 글자는 위에 특별한 장소를 의미하는 갓머리가 있고, 그 밑에 '바를 정正'이 있다. ‘정正'은 우주의 원칙이며 내 자신을 위한 최선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 내가 할 일이 있다. 나에게 유일한 한 가지(一) 임무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강제로 그만두는(止) 수련이다. 눈을 감고 좌정하여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탈출하면, 자신의 본 모습이 등장한다. 좌정을 통해 자신의 본 모습, 자신이 열망하는 세계를 떠올리는 행위를 상상想像이라고 말한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 좌정과 상상훈련을 사고실험思考實驗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춤을 추고 있는 별들의 움직임을 감지하였다.

     

좌정을 통해 나를 가만히 본다.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 순간에 몰입한다는 의미다. 과거나 미래의 시간은 언제나 순간瞬間이다. 지금 이 시간도 그것을 인식하여 온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 슬며시 과거로 흘러가 버릴 것이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영원한 순간으로 만들기 위해 하는 의례가 있다. 자신이 정한 장소에서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앉아 눈을 감는 행위다. 그 장소는 내게 다른 장소와는 구별된다. 그곳이 특별한 이유는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보목동은 나에게 좌정과 순간을 선물해주었다. 매일 이른 아침, 공부방 방석 위에 앉아 좌정하여 나에게 묻는다. “나는 이 순간에 집중하는가? 나는 나에게 정직한가? 나에게 어울리는 한 가지 원칙을 가지고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가?”

     

두 번째 원칙은 경청傾聽이다. 대화가 아니라 침묵을 연습하는 경청해야한 이유는 거울을 보면 알 수 있다. 거울을 보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눈이 두 개, 귀가 두 개, 콧구멍이 두 개다. 그러나 이상하게 입이 하나다. 오늘 내가 마주치는 것을 한번이 아니라, 두 번 보라는 경고다. 대충 보는 한번이 오해이고 편견이다. 두 번 봐야 관찰觀察할 수 있다. 어제까지 보아왔던 상相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들을 때, 한번이 아니라 두 번 들어 한다. 한 번 들으면 오해하지만, 두 번 귀를 기울여야 경청傾聽하기 때문이다. 입이 하나인 이유는, 두 번 보고, 두 번 들을 때까지, 제발 입을 열지 말라는 경고다. 침묵은 금이고, 침묵에서 만들어진 웅변은 기껏해야 은이다. 우리 정치와 종교지도자들이 수련해야 할 덕목이 있다. 한달정도 말하지 않는 침묵 수련을 하면 좋겠다.

     

경청은 상대방의 말들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듣는 행위다. 경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경청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많은 문제들, 자녀와의 문제, 친구와의 갈등, 부부와의 관계도 이 경청의 부재에서 온다. 경청은, 오랜 수련을 거쳐야 도달 할 수 있는 궁극의 실력이다. 우리는 인류가 남긴 감동적인 고전과 경전을 독서하고 필사한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경청의 최소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책을 하는 이유는 자연의 소리를 침묵으로 경청하려는 훈련이고, 굳이 해외까지 나가 명소를 둘러보는 이유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이 모습을 목도하고 경청하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경청은 한마디로 역지사지를 위한 자기 훈련이다. 그런 역지사지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경청의 비밀은 ‘지금’이다.

     

경청을 훈련하지 못한 사람은 계속해서 떠든다. 월트 휘트먼이 <자기를 위한 노래>에서 그렇게 말만 하는 사람들에 제3곡에서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I have heard what the talkers were talking, the talk of the beginning and the end,

But I do not talk of the beginning or the end.

There was never any more inception than there is now,

Nor any more youth or age than there is now,

And will never be any more perfection than there is now,

Nor any more heaven or hell than there is now.

“저는 말만하는 사람들이 말만하는 것을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처음과 끝에 대해 떠듭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이나 끝에 대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더 시급한 처음은 결코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젊거나 더 늙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천국이나 덜 지옥도 없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질문質問’이다. 우리가 온전히 경청할 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경청은 외부의 말을 본능적으로 들으려는 귀를 구부려 자신으로 온전히 향하게 하려는 훈련이다. 경청을 하는 사람이 질문할 수 있다.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다. 무의식적으로 얻은 지식을 버리기 위해서는 그 지식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자에게 질문은 슬그머니 자신의 모습을 나타나 길을 막는 괴물이 등장한다. 이 괴물은 ‘질문’은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안내자다. 질문을 통해 우리는 매일 매시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자신이 매달렸던 신념이나 삶의 본질本質을 버리고, 낯선 시간과 장소에 맞는 본질을 찾기 위해 통과하는 문(問)이 바로 ‘질문’인 것이다. 질문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이 제3자가 되어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해답이 정해지지 않는 외침이기도 하다.

     

대한민국과 전 세계가 처한 이 디스토피아 상황을 극복하는 세 단계는, 좌정, 경청, 질문이다. 교육과 종교는 외부의 정제되지 않는 그리고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정보를 수용하는 처리가 아니라, 가만히 자신이 정하 그래서 거룩할 밖에 없는 공간에 좌정하여 자연과 인류 성현들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려 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경청하여, 그것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 질문하는 정교한 예술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경청한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질문하십니까?

     

<더코라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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