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0.(木曜日) “우울憂鬱”
- Chulhyun Bae
- 2024년 10월 10일
- 3분 분량
2024.10.10.(木曜日) “우울憂鬱”
벨라가 떠난 후, 가슴 통증이 생겼다. 샤갈과 야산에 올라야, 숨이 가빠지고, 그 통증이 조금씩 사라진다. 더욱 열심히 산책하라는 벨라의 유언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혼미해진 정신을 다시 차려본다. 인생이란 마라톤에서 결승점을 모르고 뛰는 것처럼, 불행은 없다. 우리는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 하는 동물이다. 하루하루 연명하는 하루살이가 아니라, 오늘 하루가 내일로 연결되고 내일은 다시 모레로, 다음 달로, 내년으로 연결 되어야만 한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대로, 인생은 흩어진 점들에 의미라는 연결선을 창조하려는 예술적인 활동이다. 목적지를 향해 내딛는 이 순간의 발걸음만이 나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분명한 것이 아니라, ‘있을 수도 있는 개연’이 미래 이루어 질것이라고 여기는 믿음이다. 이 희망과 믿음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려는 진정한 사랑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 지옥은 고통으로 가득찬 세계가 아니라, 미래에 자신이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부재다. 단테 <신곡> 지옥편 3곡은 진짜 지옥의 시작이다. 이 지옥은 강과 그 강을 지키는 괴물에 의해 표시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이라는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통과해야 한다. 단테는 지옥에 가본 적이 있는 베르길리우스와 지옥으로 들어가는 성문에 서 있다. 단테는 성문 위에 적힌 아홉 행 비문을 본다. 첫 번째 삼행은 <신곡>에서 가장 유명한 어구반복anaphora이 등장한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은 스스로 의인화하여, 자신의 인방보에 적힌 문구를 읽는다. 인페르노 3곡은 “만일 당신이 나를 통해 간다면”per me si va로 시작한다: 1. “Per me si va ne la citta dolente, 2. per me si va ne l'etterno dolore, 3.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1. 나를 통해 사람들은 슬픔의 도시로 들어갑니다.
2. 나를 통해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갑니다. 3. 나를 통해 사람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서 9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 “여기 들어오려는 너희들,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 문장은 첫 단어 ‘라스키아테’lasciate를 직설현재완료로 해석하여 “여기 들어오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이미 버렸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지옥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예상하여 희망을 버리는 의지박약이다. 희망의 중요성을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에프스키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없다. 그는 시베리아 감옥에서 4년간 지냈다. 심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감옥에서 비교적 잘 견디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았다. 이들은 벽에 매달린 쇠줄에 묶여 있는 사람들로 2m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래에 감옥에서 나가면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희망이 쇠줄로 묶여 있는 죄수들을 살리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은 난공불락이다.
희망이 없고, 더 나은 미래가 없다고 체념하면, 우리는 우울증, 절망, 무료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희망의 씨앗을 배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에서 자라난 괴물을 방치하는 자가 된다. 인지행동연구의 창안자인 아론 백Aaron Beck (1921-2021)은 우울증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이 영원히 갈 것이고 자신의 삶이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에서 온다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절망은 우울증보다 위험하며, 자살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의 문제는 우리에게 덮친 우울증을 어떻게 접근하여, 새로운 삶의 출발로 삼느냐에 달려있다.
가슴통증과 함께 찾아오는 이 우울증은, 단테가 천국으로 올라가기 위해, 내려가 통과해야만 하는 지옥문이다. 우울증 환자 백만시대가 맞이한 대한민국이, 이 관문을 지렛대로 삼아, 각자가 자기-변신을 위한 훈련으로 삼아야 한다. 심리학자 카를 융이 말한 것처럼, 우울증은 병리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행위를 위한, 자기-자신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다.
우리는 대게 자신의 우울증의 원인에 집착한다, 내 경우, 벨라의 떠남이 가슴통증으로 왔지만, 생각을 전환하여, 벨라가 나에게 원하는 삶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벨라가 나에게 새로운 목표를 세워 힘차게 살기를 바란다고, 나 스스로를 설득하였다. 지난 9월 23일을 깃점으로, 매일묵상의 글을 ‘펫로스 반려인들을 위한 명상와 영시’라는 제목을 바꾸고, 내가 벨라로부터 받은 인생의 훌륭한 가치인, 우정, 사랑, 몰입을 매일 실천하기를 결심했다. 우울증은 원인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가를, 즉 목적을 위해 살 때, 오히려 삶의 힘이 된다.
니치스 수용소에 감금된 빅터 프랭클은 어느 날 니체의 말을 읽었다. ‘인생을 사는 ‘왜’why를 안다면, 인생의 말 할 수 없는 고통how도 이겨낼 수 있다’는 문장이 생존할 힘이 되었다. 고통에 굴복하면 우울증과 심지어는 그 이후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고통이란 딜렘마를 자기설득과 확신을 통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두렵지만, 신나는 길로 들어서는 시작이 될 수 있다.
남녀에게 찾아오는 갱년기가 40-50대였지만, 요즘은 자연과 사람과의 접촉이 줄어 들어면서, 핸드폰에 의지하는 청소년이나 청년에게도 이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우리의 인생에서 사춘기가, 육체적으로 성숙하는 첫 번째 갱년기라면, 40-50대는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변화하는 두 번째 경년기가 우울증과 함께 누구나에게 찾아온다. 그러기에 우리의 진정한 영혼 회복을 위해, 우울증은 진정한 성년식이며, 통과의례다.
‘우울증’이란 의미의 영어단어 ‘디프레션’Depression의 어원은 ‘아래로’라는 의미를 지닌 de-와 ‘누르다; 덮다’란 의미를 지닌 ‘프레메메’premere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이제 대중의 일부가 아니라, 온전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무의식에 외부에 의해 억눌렸던 그림자’를 인식하는 과정이 우울증이다. 이 덮개를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 혹은 운동, 독서, 글쓰기를 통해, 그 안에 숨겨진 감정, 혜안, 창의성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우울증 안에 자신만의 가능성, 잠재성, 그리고 당위성이 은닉되어있다. 인류의 신화는 우울증과 대결하기 위해 무의식 속으로 하강하여 그 안에 꼬아리를 틀고 잠자는 괴물을 대결하는 이야기다. 길가메시, 오르페우스, 오디세우스, 이난나, 예수도 지하세계에 내려가 충분히 죽어야 새로운 존재로 부활한다. 우울증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연못이지만, 그 안으로 내려가 그 물에서 수영해야만, 그 존재를 확인하고 탈출할 수 있다. 우울은 인생이란 마라톤을 새롭게 시작하는 새벽 수탉의 울음소리다.
사진
<수탉>
마크 샤갈 (1887-1985)
유화, 1929, 30cm x 43cm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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