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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6.(日曜日, 267th) “행인杏仁”

2023.8.6.(日曜日, 267th) “행인杏仁”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찍 산책에 나섰다. 서울에서 아방가르드란 이름으로 시작한 창세기 1-11장 공부의 열 번째 시간이자 마지막 수업이기 때문이다. 산책 후, 서울로 달려가야 한다. 성서는 특별하다. 내가 읽고 공부한 책들이 선별적이지만, 성서는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항상 읽을 때마다, 내가 어제까지 모르던 의미를 조금씩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성서를 기록한 저자들도, 자신도 모르는 경내境內로 진입하여, 입으로 중얼거리고, 손으로 적었을 것이다. 엘리야기 경험한 ’침묵의 소리‘를 적었을 것이다. 성서의 내용을 글로 적는 순간 그 의미가 축소되지만, 그 의미를 중엉거리고 내 삶에서 실천할 때, 그 의미 조금씩 다가온다.

그것은 일자무식인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꾸란의 등장과 유사하다. 히라동굴에서 기도하던 무함마드에게. 알라신이 강림하여, “우주를 창조한 알라의 이름으로 암송하라”라는 침묵의 소리를 들었다. 이 침묵의 소리를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우쓰만이 적어 꾸란이 되었다. ’암송하라‘란 아랍어는 ’이끄라‘이며, ’암송된 것‘이란 의미의 꾸란Quran이 이슬람 경전이 되었다.

성서도 그렇다. 한 때는 고전 히브리어를 잘 알면, 그 뜻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자만했지만, 번번히 좌절하였다. 성서는 인생이란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세상을 꿰뚫어 볼수 있는 혜안이 있는 사람에게, 그 깊은 뜻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하기 힘들과 해석하기 힘든 책이란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는 10번강의를 통해 창세기 1-11장, 소위 우주와 인류의 기원에 관한 내용을 도반들과 다루려고 시도했지만, 지난번 강의까지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이야기, 특히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까지 마쳤다. 나는 신이 가인에게 한 히브리 단어 ’팀숄‘이란 단어를 통해, 인간의 의지를 설명하였다.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은, 이 이야기를 기반으로 <에덴의 동쪽>이라는 소설을 썼다. 특히 이 소설의 24장에 중국인 리를 통해, 4장 9절에 등장하는 ’너는 죄를 극복할 수도 있다‘라는 문장에 대한 정교한 대화가 등장한다. 스타인벡은 히브리 단어를 팀숄이 아니라 팀쉘로 잘못 인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히브리 동사에는 소위 가능이나 당위, 혹은 잠재를 나타내는 서법敍法을 나타내는 조동사가 없기에 팀숄은 명령으로 ’정복하라‘ 혹은 희망의 의미를 담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번역해왔다. 그러나 이 단어는 스타인벡이 번역한대로, ’너를 죄를 정복할 수도 있고, 정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현한 의미를 나도 선호한다. 노아홍수이야기와 바벨탑이야기를 다루지 못해 아쉽다. 오늘 저녁에는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네필림Nephilim이야기로 이번 아방가르드 공부를 마무리해야할 것 같다.

오랜만에 6시에 산책을 나갔다. 예전에 산책할 때 마주치던 학자분을 만났다. 나는 그분이 학자인 줄은 모르지만, 은퇴를 하고 시골로 이주해와 여생을 즐기시는 분으로 판단하였다. 이 분은 항상 5시에서 6시 30분까지 산책을 한다. 8월에 되니, 잠자리가 우리를 따르고 설익은 작은 밤톨이 무더위에 지쳐 땅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오솔길을 한참 따라 들어가 그윽한 수원에서 흐르는 물을 흘려보내는 시냇가로 내려갔다. 누가 저 물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내려보내는 것인가?

물에 관한 최고의 노래는 노자의 <도덕경> 8장이다:

上善若水 상선약수

水善利萬物而不爭 수선리만물이부쟁

處衆人 之所惡 故幾於道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居善地 心善淵 거선지 심선연

與善仁 言善信 여선인 언선신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夫唯不爭 故無尤 부유부쟁 고무우

최선은 최악과 대립되는 유교적인 개념이 아니다. 상선上善은 무선무악無善無惡처럼 선악의 대립을 초월한 원초적인 개념으로 선도 초월하고 악도 초월한 개념이다. 유무有無의 존재를 초월한 무무無無의 단계와 유사하다. 상선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의 형상인 쨀램이자 더무쓰이며, 융이 말하다는 발견되지 않는 자아이며, 에카르트가 말하는 신적인 불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씨앗으로 존재하는 어짐인 ’행인杏仁‘이다. 노자는 인간이 발굴해야 할 행인을 물이라고 말한다.

물은 사람들이 교리나 사상으로 정해놓은 선악의 개념을 초월하기에 누구와도, 어떤 종교나 사상과도 다투지 않고 오히려 그 대상을 이롭게 한다. 항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저절로 흘러내려가기에 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누구와도 어울리기에 다투지 않고 허물이 없다. 나는 물과 같이 거침이 없는가?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적셔주는가? 내 마음에는 행인杏仁이 있는가?

사진

<산책 코스 시냇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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