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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23. (日曜日) “위치位置”


2023.7.23. (日曜日) “위치位置”

아침 산책 중간 정착지 시냇가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나와 반려견들은 그곳에서 잠시 쉬며 명상瞑想을 한다. 이 커다란 바위엔 이끼와 풀이 자라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잘 잡았는지, 있어야만 하는 장소에 있다. 자연, 자연 속 식물과 동물들은 모두 자신들이 있어야만 하는 장소에 있기에 자연스럽다. 흘러가는 물처럼, 언제나 상선약수다. 인간만이 예외다. 있는 장소가 어설프고 자기변명적이다. 더욱이 인간중심적으로 온갖 식물과 동물을 가둬놓는다.

만물은 그것이 있는 장소다. 그 장소를 보면, 그안에 있는 인간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 수 있다. 대중의 말에 현혹되어 그들 중 목소리가 큰 집단에 속해 우글거리던지, 아니면,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들으려고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던지. 20세기가 철학자 니체가 시대의 문법을 말했다. 그는 전자를 가축들, 혹은 인간말종이라고 불렀고, 후자를 자기극복인이라고 명명하였다. 자기극복인이란, 어제 지나가 버린 자신을 응시하여,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통해, 오늘을 자신이 되어야 할 미래 인간처럼 용감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사는 사람이다.

오늘 저녁 진행하는 ‘아방가르드는 무엇인가: 창세기 1-11장에 대한 해석“에서 신이 인간에게 던진 첫 질문質問이 등장하는 창세기 3장을 공부한다. 질문은, 한 고비에서 다음 고비로 넘어갈 때 반드시 관문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해야,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괴물이다. 창세기 2장은 인간이 ’선과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상징-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원초적인 이야기는, 그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역사적인 혹은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다.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아 나의 시간과 생각을 장악하고 있으니, 인간의 삶의 중요한 가르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야훼 엘로힘(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신명)은 ’에덴이라는 장소에 있는 정원‘에 특별히 두 그루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최초의 인류(하아담)에게 명령한다. 한 나무는 그 열매를 맺으면, 신과 같이 영원히 사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으로 영원히 살지는 않지만, 그 열매를 먹으면, 몸속에 품고 세상을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자식‘ 즉 신적인 씨앗을 획득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기록한 기원전 10세기, 학자들이 말하는 저자인 야휘스트Yahwist는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무슨 말을 전달하려 했을까? 헤롤드 블룸은 문체와 내용을 파악하여 이 무명저가 야휘스트를 여성이라고 추정했다. 나도 글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여성저자란 느낌이 든다. 이 이야기가 살아남이 기원전 5세기경 히브리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경전으로 정착될 때, 편집자들은 이 옛날이야기를 선택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자신이 저 시냇물처럼 야속하게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잡지 못해, 문화를 만들과 종교를 만들지만, 결국 흙으로 돌아가 버릴 수 밖에 없다는 비극적이며 엄연한 사실인 인간 절대멸절성을 이미 안 것이다. 그래서 에덴 정원에 있는 최초의 인류는, 생명나무의 열매는 먹으면 안된다.인간 존재의 필멸성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이 세상에서 순간을 살지만, 신처럼 살수 있다는 구원의 가능성을 표시하기 위해 ’선과악의 지식의 나무‘ 즉 ’우주의 모든 지식이 담겨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이란 정원 밖의 삶을 감안하면, 인간 삶의 기원에 대한 타당한 설정이다.

만일 신이 이런 금지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 ’모든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 먹을 리가 없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많은 과자들 중에서, 가장 맛이 있는 이 과자만은 먹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외출하는 엄마의 금지명령과 마찬가지다. 아이의 관심은 이제 엄마가 말한 그 과자만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창세기 이브에 해당하는 판도라가, 제우스 신이 상자를 열어보지 말하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상자를 연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의 삶을 대변하는 슬픔, 질병, 가난, 전쟁, 증오, 시기가 퉁켜자 나왔고, 판도라가 급히 상자 뚜껑을 닫아 희망만은 상자 안에 품었다.

판도라 마음 상자에는 세상에 모든 악을 대항하는 희망希望이 남아있었고 아담과 이브의 마음에는 우주 삼라만상의 꿰뚫어 알 수 있는 지혜와 그것을 구별해 내는 분별력의 기반이 되는 지식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이 지식은 히브리어로 ’다아쓰‘다. 다아쓰 흔히 지식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신을 추상적으로 설명한 가장 완벽한 단어이자 개념이다.

이 오래된 이야기에 이미 모든 것을 신처럼 알아버린 영물이 등장한다. 바로 뱀이다. 예수도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뱀처럼 현명하고 비둘기처럼 순진하라‘고 명령한 것처럼, 뱀은 현명의 상징이다. 아마도, 뱀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껍데기를 탈피하여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갈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주인공 길가메시가 지하세계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고 있는 우트나피슈팀과 그의 아내로부터 페르시아 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불로초를 획득한다. 길가메시는 우룩으로 돌아오는 길에 몸을 식히려 잠시 목욕하러 들어간다. 그때 뱀이 등장하여, 불로초를 삼켜버리고 뱀껍질만 남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뱀은 이 뱀과는 다르다. 오히려 인간에게 우주의 원칙이 담겨있는 ’다아쓰‘를 따 먹도록 돕는 존재로 등장한다. 세상에서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이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뱀이 여자에게 말한다. ”네가 지식의 열매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그 열매를 먹으면, 신처럼되어 모든 것을 알게 되다는 것을 알고, 금지시킨 것이다.“ 최초의 인간들은 이 지식의 열매를 먹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자신들의 중요한 부분을 덮는 ’가리개‘( חֲגֹרֹֽת)를 만들었다. 이제 남자와 여자는 야훼 엘로힘이 정원에서 산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신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정원의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 그때 야훼 엘로힘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다. 창세기 3장 9절이다:

וַיִּקְרָ֛א יְהוָ֥ה אֱלֹהִ֖ים אֶל־הָֽאָדָ֑ם וַיֹּ֥אמֶר לֹ֖ו אַיֶּֽכָּה׃

와이크라 야훼 엘로힘 엘-하아담 와-요멜 로 ’아에카‘.

(직역)

주 하나님이 하아담을 불러 그에게 말했다.

“너 어디?”

(의역)

주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을 불렀다. 그리고 그 에게 말했다.

“너는 이전에 어디 있었는냐?

너는 지금 어디로 있느냐?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냐?”

혹은 화가 고갱 유작의 왼편 구석에 등장하는 질문처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느냐?

우리는 누구이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신의 최초의 질문에는 시제가 없다. 의문부사인 ’야에‘와 2인칭 대명사 어미인 ’카‘의 합성어로 직역하자면, ’너 어디?‘다. 이 문장에서 생략된 존재 동사를 넣어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아, 너는 지금 네가 있어야할 곳에 있느냐?

인간아, 너는 지금 네가 있어야 하는 장소를 알고, 그곳을 향해 가고있느냐?

인간아, 너는 지금 네가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알고, 그것을 향해 가고있느냐?

아니면, 너는 지금 네가 있지 말아야할 곳에 있느냐?”

사진

<산책길 시내 옆 바위에 낀 이끼와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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