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22. (土曜日) “오황택”
작년, 2022년 7월 21일, 건명원을 만드신 오황택회장님께서 온전히 홀로 사재를 털어 양평에 이함미술관을 개관하셨다. 이번에는 600억이나 희사하셨다. 그날 이함캠퍼스 안 ‘콤마’카페에서 파란색 바지와 흰색 반팔 와이셔츠를 입으시고, 자신이 왜 양평에 이함캠퍼스를 개관하셨는지, 빼곡하게 적어온 노트를 읽어내려가셨다.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고 뻔뻔하게도 읽어내려가셨다. 내 옆에 앉은 디자인하우스 이영해대표님이 서울디자인재단 권영걸이사장님께, “이구...스피커 라도 좀 달아 놓지...하나도 안들려요”라고 불평하셨다. 이대표님은, 오이사장님이 건명원에 이어, 미술관을 자신의 돈으로 쾌척하신 이 기이한 일을 놀라워하시면서도 동시에 진심으로 축하하고 계셨다.
일 년이 지나, 나는 오 이사장과 만났다. 딱 일년만에 이함미술관에 있는 콤마라는 커피숍에 와 외부 테라스에 앉았다. 카페 앞에 위치한 연못이 일년이란 세월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어제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오후 3시다.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까 기다리면서, 내가 오회장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내가 오회장님음 만난 것은 2014년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 기업인들과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공부를 기획하고 있었다. 내가 여행을 가면 항상 예술작품에 대해 해설을 부탁드리는 교수님이 계시다. 국민대 김개천교수님. 김교수님께서 자신의 지인을 이탈리아 여행에 동참해도 되냐고 말씀하셔서, 그러시라고 허락했다. 그 분이 오회장님이셨다. 우리는 그해 6월에 로마, 피렌체, 시에나, 밀라노, 베네치아 일대를 돌며, 로마제국, 르네상스, 그리고 그것이 서양세계에 남긴 유산을 공부했다.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후, 2014년 7월이었을 것이다. 김교수님, 오회장님, 그리고 내가 강남 한 레스토랑에서 미팅을 가졌다. 그때 나와 김교수님은 한국의 교육이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이기에,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혁신 학교를 하나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오회장님께서는 인간의 지성과 인성발달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 중고등학생이라면서, 청소년 교육에 관심을 보이셨다. 학교에서 입학사정관으로 경험한 나로서, 한국의 청소년들과 그 학부모는 대입이라는 괴물을 이길 수 없기에 청소년 교육을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대신, 일본의 정경숙처럼, 청년들을 위해 혁신학교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오회장님께서는 “저 같은 소상공인이, 그런 학교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런 혁신학교가 한국에 정말 없나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없어요.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에요. 회장님께서 시작하시면 역사적인 일이 될 꺼에요.” 나의 열정과 확신에 오회장님께서 마음 문을 여셨다.
나는 교수진을 조직하고 9월에 바로 시작할 수 있다고 밀어붙였다. 예술분야는 김개천교수님이, 동양철학에 최진석교수, 과학분야에 김대식교수, 역사분야에 주경철교수, 언어학분야에 김성도교수를 영입하였다. 후에 최진석교수의 추천으로 서동욱교수가, 김대식교수의 추천으로 정하웅교수가 합류하였다. 그렇게 나를 포함하여 8명의 교수가 확정되고, 바로 커리큘럼을 짜기 시작하였다. 수요일엔 라틴어와 도덕경 암송과 글쓰기 수업으로 토요일엔 인문-과학-예술 분야를 다뤘다. 오회장님께서는 교수들의 강의료를 파격적으로 책정해주셨다.
오회장님께서는 교수진용이 완성된 것을 보시고, 큰 결단을 내리셨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북촌 한옥을 건명원 수업을 위해 내놓으셨다. 일단 우리는 2015년 3월에, 1년과정으로 1기를 시작한다는 목표로 총력을 집중하였다. 1기 원생들을 모집하고 선발하는 과정을 만들고, 전체 커리큘럼도 완성하였다. 동시에 김개천교수님은 북촌 한옥 개인집이었던 건명원을 스파르타교육을 할 수 있는 교육장으로 변모시키는 대공사를 시작하였다.
나는 건명원교육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알면 좋겠다고 판단하여, 토요일에 진행하는 수업을 방송으로 송출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때 경영인들을 위한 공부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중에 한 명이 KBS센터장이었다. 그는 KBS로 찾아가 건명원 커리큘럼, 인문-과학-예술 강연이 방송에 송출되어도 손색이 없다고 설득하였다. 센터장은 내부에서 치열한 논의를 거쳐, 마침내 프로그램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는 나에게 KBS사장님과 미팅을 주선해 주었다. 나는 사장님을 만나, 이 시점에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교양을 드높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될 것이란 점을 부각시켰다. 마침내 KBS가 건명원 수업을 ‘생각의 집, 건명원’이란 이름으로 2015년 1년동안 방송하게 된 것이다.
2015년 3월 개강을 앞두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들었다. 오회장님께서 그해 1월 어느 날 심장 대동맥파열로 양평에 있는 자택에서 쓰러진 것이다. 보통 사람같았더라면, 유명을 달리하셨을 것이다. 촌각을 다투는 대수술을 대수술을 받으셨다. 2015년 1월 하순, 나는 최진석교수, 그리고 김개천교수와 함께 병원에서 회복 중인 오회장님을 만났다. 입원실에 들어가니, 이사장님께서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를 반기셨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코에는 간이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생사를 오가면, 아내의 손을 잡고 오면서, 인생의 장면들이 휙휙지나가고... 그러던 중, 내가 아직 마치지 못한 일이 생각났어요. 3월에 건명원을 개강하기로했는데, 이렇게 가면 않되지...” 일생 상인으로 살아오던 그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 의미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건명원을 출범시키겠다는 의지가 그에서 또 다른 삶을 허락했는지도 모른다.
중병 수술로 회중 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오회장님이 2015년 3월4일 수요일, 건명원 입학식에 오실 줄 몰랐다. 우리의 상상을 뒤집고, 건명원 입학식날, 눈빛이 초롱초롱한 원생들과 교수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원생 여러분, 시대의 반역자反逆者가 되십시오.”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교수진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수 여러분, 원생들을 반역자로 키워주십시오.” 나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나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오회장님의 간절한 염원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한참 거의 10년전 일을 회상하고 있는데, 카페 뒤편쪽에서 오회장님이 나타나셨다. “왜 이리 일찍 왔어요?” 항상 약속에 늦는 나를 약올리는 멘트다. “더운데, 들어가 커피해요!” 우리는 마주 앉으면 처음에는 말이 없다. 인생 살만큼살아, 무슨 말도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선, 말문이 터야하고, 그런 후 질문이 생기고 주고받는다..
오회장님은 내가 이런 훌륭한 미술관을 왜 지으셨나고 아부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먼저 말씀하신다. “나는 상인이에요. 효율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죠. 열심히 일을 해, 돈을 꽤 벌었어요. 제가 500살까지 살면, 건명원이나 이함미술관 같은 건물 안짓죠. 내가 편하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돈이 있거든요. 아마도 앞으로 25년경도, 100세까지는 살 것 같아요. 운이 좋으면! 그러니, 내 가족이 충분히 쓸 수 있는 돈, 이외에는 내가 조절 할수 있는 돈이 아니에요. 자식들에게도 이미 쓸 만큼 줬어요.” 그가 건명원과 이함미술관을 지은 재원은, 자신에게 불필요하지만, 사회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사용하였다.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고 계속 우기신다. 나는 많은 부자들을 보았지만, 회장님과 같이 돈을 사용하는 사람을 못봤다고 하자, “정말이에요? 이상하데, 조금만 생각해도 계산이 나오는데....”
그리고 느닷없이 물어보신다. “건명원 개학식 때 왜 울었어요?” “감격스러우니까, 운거죠. 인생을 살면서 그런 감격스런 순간은 한 두번이에요. 그날 사람들이 많아, 창피해서, 실컷 엉엉 울지 못한 것이 한이에요.”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근처 식당으로 이동하여 이어지고, 그 후에 커피를 마시면서도 한참 대화하였다. 오랜 만에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격이 없이 6시간동안 떠들어보니, 밤이 되었다. 대한민국에 오회장님과 같은 경영인이 또 나오면 좋겠다.
사진
<2022년 7월 21일, 이함 캠퍼스 개관일, 저 앞에서 말씀하시는 오회장님>
https://ehamcamp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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