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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9.(日曜日) “패배와 아픔”

2023.10.29.(日曜日) “패배와 아픔”

새벽 바람이 차다. 우리가 야산에 오르면 항상 지난 장소가 있다. 오른편 능선 고라니 오솔길 옆에 풍파로 봉우리가 낮아진 두 무덤이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장소에 벨라가 가만히 섰다. 누가 저기에 묻혔을까? 벨라는 내년 피어날 파릇한 입을 위해, 자신을 땅에 떨어뜨린 수많은 시체 솔잎, 낙엽, 밤송이 위에 섰다. 그리고 누운 무명씨를 덮은 얕은 봉우리를 응시한다.

아, 오늘은 1년의 다른 어떤 날 보다, 무겁고 차갑게 느껴진다. 작년 오늘 일어나면 안되는 일, 동시에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참사가 일어났다. 바로 이태원 참사다. 왜, 그 참사가 세계인들이 가장 오고 싶어 하는 서울, 그 중심부 용산구 이태원에서 일어났는가? 이 참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우리 모두가 여기에 희생된 젊은이들이 우리의 딸자식으로 여기고 한동안 말없이 한없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지금은 그런 슬픔 속에 있어야 할 숙고의 시간이다. 그 필연의 이유를 알기 위해 한참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한다.

우선 이 참사 할로인란 축제를 가장하여 일어났다. 사실 서양사람들은 오랫동안 할로인을 삶과 죽음의 경계로 여겨왔다. 이 날은 모든 만물을 숨죽이게 만드는 겨울의 시작이며 생존을 위해 반드시 용감하게 건너가야 할 마지노선이다. 오늘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겨울의 도래를 알리는 중요한 날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 경계를 표시하고 마음을 준비하는 의례를 준수해왔다. 그 축제가 ‘할로윈halloween’이다. 이 단어는, 2000년 전부터 고대 셀트족의 축제인 ‘소우인’ (Samhain)에서 유래했다. ‘소우인’은 고대 아일랜드어로 ‘여름(sam)의 끝(hain)’이란 의미다.

오늘날 아일랜드, 영국, 그리고 프랑스 북부에 거주하고 있었던 고대 켈트인들은, 일 년 수고의 결실은 추수를 마치고 이젠 추운 겨울을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겨울은 자연에서 생존해야하는 모든 동물과 식품의 패배이자 아픔이기 때문이다. 패배와 아픔이라는 문을 통해, 승리와 기쁨, 환희의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 날은 신년 첫날이다. 시작始作은 언제나 희망과 설렘이 아니라 절망과 망연자실이다. 시작은, 어머니의 뱃속(始)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억지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作) 내려는 분투다.

‘소우인’은 여름과 추수를 끝내고, 어둡고 추운 겨울의 시작이었다. 켈트인들은 새해를 시작하는 전날(10월 31일)은 더위와 추위, 빛과 어둠,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교차하는 혼돈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날 죽은 자들의 혼들이 괴상한 옷을 입고 살아 있는 자들을 찾아와, 혹독한 겨울을 잘 지낼 수 있는지 점검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 날을 잘 지내야, 밤의 길이가 제일 길다는 동지冬至(12월 21일)까지 생명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을 숭배하는 켈트인들의 ‘사우인’ 축제가 어떻게 ‘할로인 축제’가 되었는가? 그 이해의 징검다리가 로마시대에 제정된 축제다. 교황 보니파체 4세는 7세기 초, 로마의 모든 신들을 모신 만신전인 ‘판테온’Pantheon을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건물로 바쳤다. 그 후 교황 그레고리 3세는 8세기 중엽에 모든 성인들과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축일을 11월 1일로 옮겼다. 9세기 그리스도교가 고대 켈트인들에게 전파되면서, ‘성인축제일’이 켈트족의 ‘소우인’이 혼합하였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11월 2일을 모든 죽은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일로 삼아 ‘만성절’萬聖節이라고 불렀다.

켈트족의 ‘소우인’과 가톨릭의 ‘만성절’이 서로 영향을 주어 오늘날 ‘할로윈’이 되었다. 영어단어 ‘할로윈’은 ‘거룩한(hollow) 날의 전날 밤(eve)’라는 뜻으로 그리스도교 만성절(11월 1일)의 전날인 10월 31일 저녁을 지칭한다. ‘할로인’이 한국의 이태원과 홍대에 도래한 경위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할로윈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이해해야한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유럽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의 나라가 되었다. 특히 1845-1852년, 집단기근과 역병이 창궐한 ‘아일랜드 감자 기근the Irish Potato Famine’을 피해 수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 이민자들과 미국 본토 인디언들의 문화가 융합하여 오늘날 ‘할로윈 축제’가 탄생하였다.

미국의 할로인 축제는 아일랜드의 죽은 영혼들이 찾아오는 ‘소우인’, 성인들과 순교자들을 추념하는 ‘만성절’과는 다른 가족과 친지들의 축제로 변모하였다. 어린아이들은 동물이나 귀신복장을 하고 한 손엔 사탕이나 과자를 담을 깡통을 들고 이웃집에 대문을 두드리며 무례하게 ‘음식’이나 ‘돈’을 요구한다. 이들은 집주인이 나오면 ‘트릭 오 트리트’Trick-or-Treat라고 명령한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고 손님이 주인이 되는 날이다. ‘트릭 오 트리트’를 번역하자면, “제가 짓궂은 일을 저지를까요? 아니면 저를 과자나 사탕으로 대접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반-협박이다. 집주인은 이런 얄궂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을 수용하고, 이들을 위해 미리 준비한 간식이나 장난감을 선물로 준다. 만일 어른들이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그 집 대문에 ‘수전노’라는 낙서를 할지 모른다. 할로인 축제의 주인은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사회의 약자다. 추운 겨울은 당장 먹을 것이 없고 잠을 잘 곳이 없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죽음이나 진배없다. 추운 겨울이 다가온다.

이 축제가 한국에 도래하여 작년에 어쳐구니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세계의 아들과 딸들이, 요즘 세상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서울의 중심 이태원에서 159명이 자신도 모르게 밀려 압사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자신의 두 발로 간 것이 아니라, 떠밀려 발을 땅에 디디지 못하고 밀리면서 압사당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는 간격이다. 그 간격이 무참하게 파괴되어, 다른 사람의 공간으로 폭력적으로 침투되면서 살, 뼈가 부러지고 마침내 숨이 끊겨 유명을 달리했다.

이 압사는 크러쉬crush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K-culture로 세계인들의 치명적인 매력인 ‘크러쉬’를 얻었지만, 이태원에서는 그 매력이 압사라는 ‘크러쉬’가 되었다. 159명 한명 한명이 온 우주이고 대한민국이며, 그 가족에겐 한없이 소중한 아들이자 딸이었으나, 작년 오늘 이들은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무명씨가 되어, 주검이 된 것이다.

이태원 참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선진국이 숫자와 물질로만 획득 가능하다는 맘몬신에 홀려, 그 끝이 벼락 끝인 줄인 모르고 달려가는 동물 떼의 최후다. 지금은, 이 참사가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 비극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묵상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릴 시간이다. 이 참사를 전 국민이 함께 어우러져 치유하지 않는 한, 혹독한 겨울이 지속되어, 영영 봄이 안올수도 있다, 이 참사의 슬픔이 악성종양이 되어, 대한민국의 심장을 강타할 것 같아 두렵다. 참사에 희생된 우리의 딸 아들, 가족, 그리고 모든 국민들을 위해, 레바논 시인 칼릴 지브란의 두 시를 가만히 들려주고 싶은 아침이다.

I. Defeat敗北

KAHLIL GIBRAN/칼릴 지브란 (1883-1931), 레바논-미국시인

Defeat, my Defeat, my solitude and my aloofness;

You are dearer to me than a thousand triumphs,

And sweeter to my heart than all world-glory.

패배敗北, 나의 패배, 나의 고독과 나의 무관심;

너는 내게 천 번의 승리보다 소중하고

세상의 모든 영광보다 내 가슴에 달콤하구나.

Defeat, my Defeat, my self-knowledge and my defiance,

Through you I know that I am yet young and swift of foot

And not to be trapped by withering laurels.

And in you I have found aloneness

And the joy of being shunned and scorned.

패배, 나의 패배, 나의 자기-지식과 나의 저항;

너를 통해, 나는 아직도 젊고 발이 빠르며

시들어가는 월계수에 잡혀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너 안에서, 나는 외로움을 발견하였고

기피와 멸시의 대상이 되는 기쁨을 알았다.

Defeat, my Defeat, my shining sword and shield,

In your eyes I have read

That to be enthroned is to be enslaved,

And to be understood is to be leveled down,

And to be grasped is but to reach one’s fullness

And like a ripe fruit to fall and be consumed.

패배, 나의 패배, 나의 빛나는 검과 방패여;

네 눈에서 나는 왕좌에 앉는 것은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읽었다.

타인에게 이해된다는 것은 자신의 수준을 낮추는 일이며,

타인에게 움켜쥐어진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충만에 도달하여

잘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 소비되는 것이다.

Defeat, my Defeat, my bold companion,

You shall hear my songs and my cries and my silences,

And none but you shall speak to me of the beating of wings,

And urging of seas,

And of mountains that burn in the night,

And you alone shall climb my steep and rocky soul.

패배, 나의 패배, 나의 담대한 동반자,

너는 나의 노래와 나의 울부짖음과 나의 침묵을 들을 것이다.

너만이 날개의 퍼뜩임과

밤에 불타는 바다와

산들의 충동을 내게 말할 것이다.

너만이 나의 가파른 바위투성이 영혼을 오를 것이다.

Defeat, my Defeat, my deathless courage,

You and I shall laugh together with the storm,

And together we shall dig graves for all that die in us,

And we shall stand in the sun with a will,

And we shall be dangerous.

패배, 나의 패배, 나의 불멸의 용기,

너와 나는 풍풍과 함께 웃을 것이다.

우리 안에서 죽을 모든 것을위해 무덤을 팔 것이다.

우리는 태양 아래 의지를 가지고 설 것이며

우리는 위험危險하게 될 것이다.

II. Pain아픔

KAHLIL GIBRAN/칼릴 지브란 (1883-1931), 레바논-미국시인

Your pain is the breaking of the shell

that encloses your understanding.

당신의 아픔은 신의 이해를 둘러싼

껍질을 깨는 것입니다.

Even as the stone of the fruit must break, that its

heart may stand in the sun, so must you know pain.

석과가 부셔질 때라도, 그 씨가 담겨있는

중심은 태양 아래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And could you keep your heart in wonder

at the daily miracles of your life, your pain

would not seem less wondrous than your joy;

그래야 당신은 경이롭게 당신의 심장을

당신의 삶에 매일 일어나는 기적들을 경탄한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픔은

당신의 기쁨보다 덜 경이롭게 보일지 모릅니다.

And you would accept the seasons of your

heart, even as you have always accepted

the seasons that pass over your fields.

그래야 당신은 당신 심장에서 일어나는

사계절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들판에서 일어나는 계절을 항상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And you would watch with serenity

through the winters of your grief.

그래야 당신은 슬픔이라는 겨울 내내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Much of your pain is self-chosen.

사실 당신 아픔의 대부분은 당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It is the bitter potion by which the

physician within you heals your sick self.

그것은 당신안에 있는 의사가 당신의

아픈 자아를 치료하는 쓰디쓴 약입니다.

Therefore trust the physician, and drink

his remedy in silence and tranquillity:

그러므로 의사를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평온하게 그의 처방약을 마시십시오.

For his hand, though heavy and hard, is guided

by the tender hand of the Unseen,

And the cup he brings, though it burn your lips,

has been fashioned of the clay which the Potter

has moistened with His own sacred tears.

왜냐하면, 그의 손은 무겁고 딱딱해도,

모이지 않는 분의 부드러운 손에 의해 인도됩니다.

그리고 그가 가져오는 잔은, 당신 입술을 태울지라도,

토기장이가 자신의 성스러운 눈물로 촉촉하게 만든 진흙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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