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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무명 네덜란드 화가
유화, 17세기
오늘 저녁 한 인터뷰를 보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라, 표정을 유심히 보았다. 질문자가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몇 번 잡혔다. 질문을 받는 사람의 표정을 보고 실망했다. 질문지의 의도가 무엇인지 깊이 파악할 마음이 없는 표정이었다. 한 사람의 말을 경청할 수 없는 사람은, 다수의 말들을 종합하여 경청하여 통찰력이 있는 대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대한민국에선, 나를 포함하여, 잘 듣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들음은 오랜 자기 수련을 통해 나오는 인내이며, 상대방을 파악하는 첩경이고, 자신을 파악하는 현미경이다. 들음은 누구에게나 구원이며 희망이다.
왜소한 인간들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 자신보다 큰 사람 앞에서 위축되어 변명하기 일쑤다. 상대방의 위용과 존재가 상대적으로 그들을 초라하게 만들고 자존심에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루소Rousseau는 현대인들은 원시인들에 비해서 사치스럽고, 게으르고 연약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고 경쟁적이며, 심지어 상대방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이 있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루소가 진단한 현대인들의 심성을 ‘르샹티망resentment’이라고 불렀다.
니체는 <차라투르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왜소한 자들에 관해서’에서 르샹티망을 설명한다. 그들은 하루 종일 현대인들에게 초인이 되라고 촉구하는 차라투스트라를 경계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오히려 이 눈초리와 경계를 즐긴다. 그들의 시기는, 그가 그들과는 다른 삶을 지향하고 스스로 고양시키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왜소한 자들이 주로 하는 일을 ‘해코지’다. 초인을 끌어들여 자신들과 똑같이 왜소하게 만들어야지, 자신이 앓고 있는 우울함이 일시적으로 풀린다. 그(녀)를 똑같은 왜소한 인간이 타락시켜야지,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 니체는 그들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눈을 뜨고서 이러한 민중 사이로 가고 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덕을 시기하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물어뜯는다.
나는 왜소한 자들에게는 왜소한 덕이 필요하다고 그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소한 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나는 낯선 농가로 들어간 수탉과 같다.
많은 암탉들조차도 이 수탉을 문다.
그러나 나는 이 암탉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암탉들에 대해 일체의 사소한 분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공손하다.”
왜소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삶은 이것이다. 갈등이 없는 밋밋한 삶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이웃사랑, 자비와 정, 평등, 그리고 공정과 같은 덕에 집착하고 찬양한다. 이와 같은 덕들은 자유를 추구해야할 사자를 순종만 하는 유순한 낙타로 만든다. 늑대를 개로 만들더니, 이제는 인간 스스로가 가축으로 변모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저들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처럼, 암늑대의 젖을 먹으면서 위대한 로마를 건설했던 그런 기상을 잃어버리고 온화하고 조화로운 노력을 진선미로 착각한다.
랄프 왈도 에메슨이 <자기신뢰>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Cast the bantling on the rocks,
Suckle him with the she-wolf's teat
Wintered with the hawk and fox,
Power and speed be hands and feet.
“꼬마를 바위위에 내치십시오.
암 늑대의 젖을 물게 하십시오.
매와 여우가 훈련을 시킨다면,
그(녀)의 손과 발이 강력해지고 빨라질 것입니다.”
인간이 성장하려면, 왜소한 덕이 아니라, ‘위대한 덕’을 추구해야한다. 갈등과 싸움을 피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중심에서 자신의 한계를 확장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한다. 다시 주위사람들의 요구에 단호히 거절하는 ‘거룩한 부정’을 외치는 사자로 돌아가야 한다. 사자의 덕은 인간에게 도전이다. 도전은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다. 오늘날 인간 사자는 드물다.
사자-인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선의 화신이 아니라, 선을 위하는 척하는 위선僞善적인 인간이다. 니체는 가장 위선적인 인간 세 부류를 나열한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한껏 낮추어 민중의 심부름꾼이나 민중의 지팡이니 하며 자기비하를 사람들 앞에서 서슴지 않는 자들이다: 종교인, 정치인 그리고 정부관리들 이다. 그들은 배부른 민중을 돼지로 만드는 것이 죽어가는 검투사보다 더 나은 삶이라고 굳게 믿는다. 왜 한국의 리더들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왜소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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