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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7. (月曜日) “두 번째 실수: 맹목盲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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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면 물가 백조들>


2022.3.7. (月曜日) “두 번째 실수: 맹목盲目”

봄이 왔다. 백조들이 둥지를 틀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다. 저마다 나뭇가지를 물로 보금자리 만들기에 바쁘다. 산책길가 건너편 습지에 있는 높다란 나무에 백조들이 집을 짓는다. 두 마리가 비행을 하며 생명의 탄생을 노래한다. 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안다. 누구의 눈치를 보는 일이 없다. 선명하게 해야할 일을 깨닫고 매일 매일 그것만을 누가 뭐라해도 수행한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해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모르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에 빠지는 오만한 인간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그리스어 ‘아테ἄτη’다. 아테를 번역하자면, 맹목盲目이나 실명失明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간을 인생의 처음 순간으로 감사하며 생경한 시선으로 수용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하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어제의 생각으로 수용하는 사람은 감흥이 없거나, 입만 열면 불평한다.

승화昇華된 인간은 과거에 연연해지 않는다. 아니 자신의 삶에서 과거를 제거했기 때문에 기억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꽃을 찾아 훨훨 날아가는 나비가, 애벌레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치 저 놓은 정상을 향해 치솟아 오른 매가 깨어나기 전 거주했던 알 상태의 자신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10개월 정도 있었던 어머니 뱃속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과 같다. 그 뱃속은 우리의 현재를 만든 자궁이지만, 그것에 연연하는 순간, 그는 이미 죽은 동물이다.

전혀 새로운 상태로 진입한 인간은 과거라는 편견과 자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습관을 끊은 지 오래다. 과거라는 추상이 만들어낸 유물이 교리敎理이며 이념理念이다. 인간은 자신이 동의한 적도 없고 고백한 적도 없는 과거의 교리와 이념의 노예가 되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먼 옛날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풀기위해 만들어 놓은 ‘임시방편臨時方便’을 우리는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장식하여 우상처럼 떠받든다.

새로운 리더가 등장했지만, 그가 오래된 관행을 반복하는다면 그는 이미 실패한 리더이고 죽은 자다. 그런 과거 사로잡힌 채로,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호언하는 사람은 유기해야한 자신의 나쁜 습관으로 돌아가겠다고 대놓고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다. 그런 과거는 내가 애지중지한 색안경이다. 세상을 보기 위해 착용해야하는 안경이지만, 내가 새로운 시선을 장착해야한다. 그리고 과거의 안경을 가차 없이 버려야한다. 위대한 개인은 매일매일 어제까지 애지중지했던 색안경을 벗어 던지는 자다. 그(녀)는 오늘 여기에 자신의 눈앞에 등장한 당면한 문제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시하고 그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위대한 개인은 안목眼目을 지닌 자이기만, 비극적인 인간은 맹목盲目한다. ‘안목’이란 자신에게 당장 떨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떠올리는 능력이다. 인생은 언제나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두 갈래 길의 연속이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란 시의 내용처럼, 두 길 다 좋아 보여, 두 길 다 걸어 보지 않고는,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미리 추측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가야할 길을 안다. 자신이 이끄는 대중의 의견들은 항상 분분하고 동시에 상충된다. 대중은 서로 상충하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원한다고, 그 방안이 옳을 수 없고, 소수가 주장한다고, 그 방안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 깊이 숙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여, 깊은 성찰을 통해 그 방안을 도출시켜야한다. 지혜로운 침묵이 그를 인도할 것이다. 지혜로운 침묵을 통해 산출되는 신의 선물이 ‘안목’이다. 안목에 대한 탁월한 비유가 복음서에 등장한다. 한 농부가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천국天國’을 발견하였다. 예수는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마태복음> 13.44에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사람이 이를 발견하면, 숨겨 두고 기뻐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안목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보물을 인식하고 발견하고 소유하는 실력이다. 농부가 보물을 발견한 장소는 금은방이 아니라, 자신이 땀과 눈물을 통해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일상인 밭이다. 그는 자신이 사시사철 땀을 흘리는 노동의 현장인 밭에서,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였다. 보물은 원래 숨겨져 있기 때문에 값비싸다. 보물이 흔하다면, 그 가치를 잃는다.

과거의 인물은 ‘맹목盲目’한다. 지구는 공전하고 동시에 자전하면서, 우주 안에서 주어진 황도를 지키는 것 같지만, 사실 오늘 우리가 승선한 지구가 처한 위치는, 처음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이다. 맹목을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 ‘아테ἄτη’는 사리가 어두워 자신이 가야할 유일한 길, 그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미망迷妄이며, 과거에 사로잡혀 노예로 전락하는 상황인 탐닉이며 중독이다. 그런 사람의 언행은 언제나 성급이며 충동이다.

리더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에 등장하는 갈림길에서 가만서 서서 주저하고 고민하는 자다. 어디로 가는지, 한참 서 있고 망설여야한다. 그 망설임이 그에게 맹목을 걷어내고 희망의 길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 길에서 오이디푸스는, 우연히 만난 사람과 말다툼 끝에 그를 살해한다. 자신의 손에 살해당한 사람이 아버지란 사실을 한 참에 알게 된다. 승승장구하여 테베를 염병으로 창궐하게 만는 스핑크스는 죽이고 테베의 역병을 멈추게 만든다. 테베 시민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 테베의 여왕을 아내로 맞이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맞이한 여왕이 어머니란 사실을 깨닫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 비극공연을 보는 관객들은, 이 사실을 엄연하게 알지만 정작 영웅노릇을 하는 오이디푸스는 모른다. 그는 맹목이란 염병에 걸렸다. 테베의 여왕은 자신이 재혼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살한 어머니의 옷에서 발견한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그는 맹목을 거쳐 실명失明하게 된 것이다. 나는 맹목하는가 아니면 안목을 지녔는가? 나는 그 맹목으로 사리를 분별하지 못한 장님인가, 아니면 나만의 등불을 켜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가? 나는 저 백조처럼, 훨훨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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