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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30. (水曜日) “여유餘裕”

[사진]

<Cassago Brianza>

 

역사는 언제나 한 사람의 결단을 통해 새로운 경로로 들어선다. 사람들은 대중의 힘이며, 거스릴수 없는

역사의 흐림이라고 주장하면, 그 흐름의 물꼬를 트는 자는 언제한 개인 한 사람이었다. 그런 혁신적인

인간의 특징이 있다. 현재의 삶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현상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 삶이, 예들 들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화려하고 행복해 보일 수 있으나, 정작 그(녀)를 삶에 대한 열정과 환희로 이끌지는 못한다. 그가 조용히, 정색을 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 그 안에서 건져 올린 자기 확신이라는 진주를 건져 올려야 행복하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은, 단연 4세기 성인으로 알려진 어거스틴이다. 그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북 아프리카 튀니지아의 싸가스테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북아프리카의 상업적으로 번창하고 지적으로 충만한 도시는 카르타고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성공한 인물로 만들 싶은 교육열이 높은 한국학부형과 같은 엄마였다. 그녀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 카르타고에서 유학시킨다. 그것이 기반이 되어, 어거스틴은 당시 로마세계의 가장 중요한 도시들 중 하나였던 밀라노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성공을 위해 달려온 어거스틴에게 수사학교수라는 직업은, 머리에 쓴 월계관이었지만, 그의 최선을 발동시킬 궁극의 임무는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어기스틴으로 거듭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밀라노에서 수사학을 2년정도 가르쳤지만,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가슴에 통증이 있는 pectoris dolor라는 진단을 받고 자신에게 평온을 선사하기 결정하였다. 그는 밀라노 수사학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로마사회에서는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많은 정치인들을 배출하는 것이, 세네카의 경우처럼, 소위 출세가도currus honorum의 유리한 지점이었지만, 그는 이 사다리를 걷어찬다. 386년 8월, 그는 밀라노에서 북서쪽으로 60km떨어진, 카시키아쿰Cassiciacum이라는 밀라노 근처 빌라에서 7개월동안 친구들과 지낸다. 이곳은 그의 부자 친구 베레쿤두스Verecundus의 별장이 있었다. 지금 ‘치타 텔라 아고스티니아나’Cittadella Agostiniana, 즉 ‘어거스틴의 도시’라고도 알려져 있다.


어거스틴 시대에는 ‘루스 카시카키움’Rus Cassiciacum이라고 알려진 지역이다. 그는 밀라노에서 오늘날 브리안자Brianza라고 알려진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카시카키움을 비아 부사Via Busa라는 도로를 통해 도착하였다. 카시카키움은 오늘날 카사고 브리안짜Cassago Brianza라고 불린다. 로마 정치가들과 상인들은 종종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영혼을 되찾기 위해 별도의 공간 빌라를 찾았다. 빌라는 초원, 들판, 그리고 숲으로 둘러 쌓인 널찍한 집들이다. 로마의 지식인들은 이곳에서 독서와 명상을 동반한 후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피정避靜과 같은 수련을 실행한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바쁜, 그래서 심신을 지키게 만드는 삶을 ‘네코치움’negotium이라 부르고, 고요한 자기응시의 시간을 ‘오티움otium’이라고 불렀다. 네코치움은 타인을 설득하는 기술이고, 오티움은, 숨겨진 자신을 발견하고 설득하는 훈련이다. 어거스틴은 친구 알리피우스, 어머니 모니카, 그리고 사생아 아데오다투스, 동생 나비지우스, 그리고 사촌인 라르티디아누스와 루스티쿠스와 함께 갔다. 그의 제자인 리첸티우스와 트리제티우스도 동행하였다.


밀라노와 로마제국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떠나, 카시카키움에서 오티움을 즐겼다. ‘오티움’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모르는 사람에겐, 오티움은 ‘게으름’이다. 그러나 정신없이,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새롭게 마음을 잡으려는 사람에겐, ‘여유餘裕’이며 장자가 말하는 ‘소요逍遙’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형태의 여유를 가질 작정이다. 어머니 모니카의 권유와 밀라노 대성당에서 만난 암브로시오스를 통해 성서와 신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는 예비신자로, 철학과 신학을 융합한 새로운 형태의 사상을 만들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플라톤, 키케로, 특히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이곳에서 친구들과 지적이며 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의 오티움은 다음 세 단계를 거쳤다.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돌아보는 묵상기도默想祈禱, 마음의 상을 인내를 가지고 바라보는 관상觀想, 그리고 친구들과 그 내용을 토의하는 대화對話.


이들의 대화는 철학적이며 종교적으로 어거스틴의 <대화들>이란 제목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한 서기관이 어거스틴과 친구들의 대화를 기록하여, 후대에 책으로 묶여졌을 것이다. 이 내용은 오전과 저녁시간에 그들이 나눈 철학적인 대화들이다. 어거스틴은 당대 최고로 유명한 수사학자로 이 대화를 이끌었을 것이다. <대화들>이란 책은 다음 다섯 주제로 기록되었다. 첫째 ‘철학’과 ‘확신’에 대한 토론인 ‘콘트라 아카데미코스Contra academicos’ 즉 ‘지식인들에 대항하여’라는 주제이다. 둘째, 진정한 행복에 대한 토론인 ‘데 베아타 비타’De beata vita 즉 ‘행복한 삶에 관하여’라는 주제이다. 셋째, 세상의 질서와 악의 문제를 다룬 ‘데 오르디네De ordine’ 즉 ‘질서에 관하여’라는 주제이다. 넷째, 신에 대한 깊은 묵상인 ‘솔리로퀴아Soliloquia’, 즉 ‘독백들’ 그리고 다섯 번째 영혼의 문제를 다른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다.


이 책에서 성서 인용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화들>은 철학적인 반면, 후대 힙포의 주교가 되오 저술한 <고백론>과 <신의 도성>은 철학적이며 신학적이다. 여유는, 일보 후퇴가 아니라 백보 전진이다. 여유는 흘러가는 시간을 낚아채, 하루를 일년으로 만들려는 섬세한 자기응시를 위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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