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헤파이스토스(불칸)에 의해 묶이는 프로메테우스>
1623년
디르크 반 바루렌Dirck van Baburen
레이크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2022.2.22. (火曜日) “이야기”
우리는 인간의 지적인 능력가운데, 이성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학교에서 배우고 사회에서 세뇌당한다. 인간은 이성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의도를 한 눈에 알아 버리는 직감도 있고, 타인의 감정을 온 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감성도 있다. 인류가 17세기에 등장한 과학혁명을 통해, 이성을 숭배하고, 인간이 지닌 다른 개성들을 이성을 위한 노리개로 전락시켰다.
과학科學은 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 원천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18세기부터 서구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과학혁명은 인간을 단순히 생존하는 동물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고 누리는 문화적인 인간으로 변모시켰다.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풍요한 삶을 위해 ‘여유’와 ‘여가’를 향유하게 되었다. ‘여유’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상상력과 창의력이란 씨앗을 뿌려, 더 많은 발명과 발견을 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 성 어거스틴이 꿈꾼 ‘오티움 쿰 디그니테’otium cum dignite 즉 ‘위엄을 누리며 여유를 즐기는 삶’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기술혁명으로 이어졌다, 현미경, 망원경,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로봇 등 수많은 문명들은 창조적인 소수가 자신에게 몰입하는 ‘여유’를 통해 우연히 발견된 것들이다.
근대인류는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자신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로 진입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끊임없는 경쟁으로 이루어낸 효율성과 최적의 전략을 산출하는 이성은 오히려 빈부의 격차를 심화하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인류는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각 링 위에서 힘을 겨뤄야만했다. 이 비정한 경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는 가공할 만한 ‘힘’을 바탕으로 휘두르는 ‘폭력’이다. 장기집권에 취한 현대판 차르인 푸틴은 자신이 가진 가공할 만한 무기로 우크라정도는 속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비례적으로 평가 절하되기 시작한 것이 있다. 이것은 인류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삶의 동력을 선물이였다. 바로 ‘이야기’다. 이야기는 자연의 알 수 없는 섭리와 같다. 씨앗이 땅에 뿌려져, 싹을 나게 하고 줄기를 내며, 시절을 쫓아 꽃과 열매를 만개한다. 이 모든 과정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농부는 가장 좋은 씨앗을 찾아 땅을 개간하고 정성을 다해 나무를 가꾸고, 기다린다. 농부는 자연의 섭리를 믿는다. 자신은 어떤 경로로 곡식과 열매를 맺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조그만 씨앗이 커다란 과실로 변했다는 기적을 믿는다.
이야기는 인류 문명을 꽃피우게 만드는 씨앗이자 자연의 섭리와 같은 것이다.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혹독한 빙하시대를 거의 이십만년동안 견디면서 살아남았다. 그들은 동료들과 함께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신이 사냥한 이야기, 거대한 산과 강에서 살아남은 모험담, 맘모스나 곰을 목격한 경험담을 이야기하였다. 이 이야기를 통해,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변하면서 현생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부터 사 만년전 일이다.
현생인류는 자신의 경험담을 넘어서 오감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세계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여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들은 북극에서 ‘오로라’를 보고 놀라 누군가 하늘에 예술작품을 남겨놓았다고 상상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과 별똥을 보면서, 너무 감격하여 가만히 앉아 울기만 했을 것이다. 자연은 자신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신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누가 하늘과 땅을 만들었을까? 누가 저 흉흉한 바다를 창조하여, 금을 그어놓고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고 했을까?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인간’이란 동물을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 끝인가?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인가? 누가 ‘불’을 만들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담은 그릇을 ‘이야기’라고 부른다. 우리는 특히 삼라만상의 기원을 다른 이야기를 ‘신화’라고 부른다.
현대인들은 ‘신화’를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쯤으로 생각한다. 갈릴레이의 지동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우주창조에 관한 빅뱅이론 등과 같은 첨단이론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이 주장들을 터무니없는 ‘신화’로 여겼을 것이다. 아직도 많은 과학적인 주장들은 주장일 뿐이지,100년 후 시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가진 과학적인 수준에서 잠시 ‘참’일 뿐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우주와 인간의 기원, 그리고 인간문명의 핵심인 ‘불의 발견’에 관한 신화를 다룬 작품이다. ‘계몽주의’와 과학주의를 신봉한 18세기 유럽인들이 이 작품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특히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주장한 비극의 정의를 신봉하고 있었다. 비극은 ‘행위’에 대한 재현이고, 그 주인공은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취약점을 가진 영웅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준에 따르면,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은 수준이 낮은 비극이다. 이 비극은 행위가 아닌 ‘이야기’가 중심이며, 등장인물들은 모두 신들이기 때문이다. 18세기말부터 계몽주의와는 다른 사조가 부흥하였다. ‘낭만주의’다. 낭만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엄격한 비극정의를 느슨하게 풀고, 그 작품이 지향하고 있는 씨앗과 비전을 보기 시작하였다. 낭만주의 시대 문학 비평가들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세익스피어의 <햄릿.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왜 그랬을까?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상징극象徵劇이다. 그에게 신화는 비극의 가장 중요한 소재다. 신화는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인 진리를 전달해 주는 긍정적인 심리학이며 신학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인간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있는 위대하고 영속적인 진리에 대한 자극이며 찬양이다. 아이스킬로스는 극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류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원초적인 시점으로 아테네 관객들을 인도한다. 그는 근본적인 질문을 신화적인 인물을 통해 묻는다. 이 작품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이 관객들의 삶과 연결되어 직접적인 ‘공포’과 ‘연민’이란 감정을 직접적으로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원형극장에 모인 관객들은 자신들이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옛날이야기를 무대에서 보고 있었다. 모든 관객들은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한 타이탄 프로메테우스를 이미 알고 있었다. ‘타이탄’이란 우주에 아직 질서가 생기기전, 우주를 다스리던 신적인 존재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프로메테우스는 올림포스 신전의 통치자인 제우스에 대항하여, 인간에게 따뜻함과 안락함을 상징하는 불을 훔쳐 전달한 영웅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시민들은 이전시대 아테네의 참주인 히피아스와 히파르쿠스, 낙소스 섬의 참주인 리그다미스, 그리고 사모스섬의 참주인 폴리크라테스의 폭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축하려는 민주주의가 이들과 같은 독재자로 쉽게 허물어 질수 있다고 걱정하였다. 그들이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올림포스의 통치자인 제우스와 인간의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지닌 프로메테우스의 갈등을, 참주와 그것에 대항하는 반란군의 대결로 보았다. 아테네인들은 이들의 대결을 인간 마음속에 있는 동물적인 본능과 영적인 감성, 폭력과 설득, 힘과 지적인 능력의 한판 승부로 생각하였다.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고요한 호수의 돌과 같이, 파장을 일으켰다.
프로메테우스는 전통적으로 진리라고 수호해왔던 정의와 법이라는 틀을 전복시키려는 혁명가의 상징이다. 그는 ‘힘’에 대항하는 ‘참신한 지식’이다. 그는 또한 인간들의 개별적인 창의성을 말살시키려는 독재자에 대항하여, 그들에게 지적인 능력을 선물하여, 스스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원자다. 더 나아가 프로메테오스는 신에 대항하여 스스로 온전한 인간으로 자립하려는 완벽한 인간의 표상이다. 인유인원에게 불을 가져다 주어야겠다는 참신한 생각을 하는 프로메테우스를 당시 상식과 과학을 상징하는 헤파이스토스가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그를 십자가에 처형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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