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카잔차스키 묘비명>
크레타, 헤라클리온 마르티네고 요세
2022.2.13. (日曜日) “자유自由”
카잔차키스 소설의 중심은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지식인으로 자신의 동방그리스도 정교회 교리를 무작정 수용할 수 없었다. 그가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이나 <다시 못 박힌 그리스도Christ Recrucified>에서 그가 공부한 니체의 사상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신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 고민은 니체나 도스토에프스키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는 ‘너무 인간적이며 숭고한’ 지적인 숙고다.
1957년 백혈병을 앓는 카잔차키스는, 아시아를 보고 싶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을 방문한다. 돌아오는 길에 병세가 악화하여 독일 프라이부르그로 이송되어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 크레타 섬 헤카클리온의 가장 높은 마르티네고 요세에 묻혔다. 크레타 섬, 바다 그리고 산들 바라보며, 자신의 쓴 묘비명 아래 영면하였다.
카잔차키스는 특이한 필체로 유언을 묘비명에 적었다. 첫째 행에 등장하는 ‘원하다’와 ‘두렵다’라는 동사에 등장하는 π를 마치 영어 w처럼 썼다. 두 번째 행의 첫 단어는 Δε가 아니다 Δεν이 되어야하지만, 순음 φ가 뒤따라오기 때문에 마지막 ‘눈’(ν)을 생략하였다. ‘두려워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는 φοβούμαι인데 모음 ύ를 생략하고 그 대신에 모음 ο위에 장음표시로 매크론을 그 위에 그려 넣었다. 마지막 행 철자가 가장 신기하다. ‘자유롭다’라는 의미의 일반적인 철자는 ἐλέυθερος다. 그는 엑센트는 물론 ‘자유롭다’라는 동사의 첫 철자 모음 ἐ와 υ를 생략하였다.
철자에 신경을 쓰는 나에게 카잔스키스의 묘비명을 철자에 맞게 쓰라면 다음과 같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ελέυθερος
그는 대중이 사랑하는 구어체 그리스어로 유언을 남겼다. 위 유언을 번역하지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제)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이제)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자유롭습니다.”
그는 크레타 섬 가장 높은 곳에서 바다건너 그리스, 터키, 그리고 유럽 전체를 보면서 자신의 삶을 이 세 문장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일생,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은 초연한 삶,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는 용감한 삶, 마침내,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다 연면한 것이다. 바라는 것이 없고 두려운 것이 없을 때, 인간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일에 몰입하여 진정한 자유自由를 누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自由)는 자기 스스로가 원인이자 결과인 상태이다. 자신의 고유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깊은 성찰에서 나와 후회가 없는 삶의 스타일이다. 자유는 스스로 간절하게 원하는 바를 유유자적하면서 노닐 때 슬며시 자신의 모습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자유(自由)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거침없이 행하는 자유(自遊)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어떻게 무심하면서도 고요하게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하면서 살 수 있을까.
영어에서 ‘자유’를 의미하는 형용사 프리(free)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 이외에 ‘사랑의 빠진 상태’란 뜻이다. 자유는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일한 사랑을 찾아 그것에 빠지는 행위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만나는 존재를 프리와 같은 어원을 지닌 프렌드(friend), 즉 ‘친구’라고 부른다.
자유는 내가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과 일치가 될 때 모습을 드러내는 보물이다. 내가 사랑하는 나만의 노래를 부를 때 다가오는 내면의 친구다. 그 사랑은 외부의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내 밖에 떠도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심장 안에 숨어있는 보물이다. 그것이 내게 보물인 이유는 내가 마음의 연못으로 깊이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내려가면, 그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