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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2021.11.27. (土曜日) “Homo natura”
인간은 누구인가? 아니 인간은 누가 되어야하는가? 니체는 <선악의 저편> 금언 230 마지막 부분에서 ‘교리와 사상’에 탐닉한 근대 인간을 일깨우면서 Homo natura가 되라고 외친다. 그는 현대인을 ‘호모 나투라’라고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들의 말은 아름답고, 빛나며, 운율을 맞추고 즐겁다. 정직, 진실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 지식을 위한 헌신, 진실한 자들의 영웅적인 마음. 이것들엔 인간의 마음을 자긍심으로 가득 차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은둔자들과 설치류들은(Einsiedler und Murmelthiere) 우리 스스로를 은둔자들의 양심을 비밀스럽게 간직한 채, 설득해왔다. 이 그럴듯한 장황한 말들은 또한 오래된 군더더기 장식, 싸구려 장식, 금으로 장식한 비양심적인 인간의 허영이다.
그와 같은 아부하는 색과 떡칠한 색들이라 할지라도, 그 무시무시한 원전인 ‘호모 나투라’ 즉 ‘자연인’을 다시 인식해야한다. (der schreckliche Grundtext homo natura wieder heraus erkannt werden muss) 우리는 인간을 다시 자연으로 되 돌려야한다.(Den Menschen nämlich zurückübersetzen in die Natur;) 영원한 원전인 ‘호모 나투라’위를 (über jenen ewigen Grundtext homo natura) 할퀴고 덧칠하여 수많은 허영심으로 가득한 몽상적인 해석과 열등한 해석들을 섭렵하고, 오늘 이미 현존하는 인간으로 두발로 서야할 인간을 앞질러 (vor dem Menschen steht, wie er heute schon)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견고하게 만들어 자연의 ‘다른 형태들’앞에 서게 만들었다.
‘자연Homo natura’은 이제 두려움이 없는 오이디푸스의 눈을 가지고, 오래된 형이상학적인 새잡이의 꿰임에 무심한, 꽉 막힌 율리시즈 귀(mit unerschrocknen Oedipus-Augen und verklebten Odysseus-Ohren)를 지니고 인간들에게 오랫동안 소리쳐왔다: ‘너는 더 이상이야! 너는 더 높이 나를 수 있어. 너는 태생이 달라!’("du bist mehr! du bist höher! du bist anderer Herkunft!")라고 소리쳐왔다. 이것이 이상하고 어리석은 과업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과업이다.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왜 우리가 이 어리석은 과업을 선택해야하는가? 다시 질문하자면, 왜 하필이면 지식Erkenntniss인가? 누구나 우리에게 이것을 질문할 것이다. 우리가 대답을 해야만 한다면, 우리 스스로 이 질문을 스스로 수 백번 물어야한다. 우리는 더 좋은 대답을 찾지 못했고 찾을 수 없다....”
니체는 인간이 다시 돌아가서 참고해야할 원전Grundtext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호모 나투라’다. 호모 나투라는 우리에게 ‘너는 너 이상이다’, ‘너는 더 높이 나를 수 있다,’ 그리고 ‘너는 그 무엇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태생이다’라고 외친다. 호모 나투라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간의 원형은 이마고 데이Imago Dei와 유사한 개념이다. 그것은 노자가 말한 도가 만들어내는 궁극의 예술은 ‘자연自然’이기도 하다. 니체가 주장한 Homo natura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휘트먼은 Song of Myself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노래한다.
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
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그리고 내가 취한 것을 당신도 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속한 모든 원자原子가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위사람들과 주고받는다. 나는 지금 150년 휘트먼의 시를 가져와, 내 생각과 감정을 기록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타인이 만들어 놓은 물건들 취하여 나의 일부로 만든다. 내가 지금 취한 것은, 내 소유일 뿐만 아니라, 이웃의 소유이기도 하다. 나를 구성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원자라 할지라도, 그것은 원래 내것이 아니었다. 아침 밥상에 올라온 밥은, 내가 알지 못하는 농부의 일년 내내 농사를 통해 추수한 것이다. 누군가 그 낱알을 도정하고 포장하여 집 근처 시장으로 가져왔고, 나는 그것을 돈으로 구입하였다. 이 밥의 기원을 더 추적하자면, 농부가 심은 씨앗이 무르익은 벼가 되기까지, 바람, 비, 햇빛 등 셀수 없는 자연의 개입하였다. 이 쌀의 원자는 우주와 자연전체가 끊임없이 개입하여 상호작용과 재배치로 만들어낸 기적이다.
1인칭 단수 대명사 I로 시작한 첫 단락이 2인칭 단수 대명서 You로 끝났다. 휘트먼은 이 시를 통해 자신을 각성을 You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You는 영어에서 그 의미가 다양하다. 독일어나 불어에서 2인칭 단수와 복수, 2인칭 평서와 존칭이 별도로 존재한다. 독일어 du, ihr, Sie의 사용이 그렇고, 프랑스어 tu, vous, Vous가 모두 2인칭을 나타내는 대명사이지만, 그 용례가 다 다르다. 영어의 you는 독일어나 프랑스와는 달리 쓰임이 다의적이며 문란하다. you는 인연들이 상대방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동시에 상대방에게 존경을 표시하기도 한다. you는 또한 단수이기도 하고 복수이기도 하다. 휘트먼에게 you는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시를 읽는 독자 한명이기도 하고, 불특정 다수를 지칭한다. 휘트먼은 you에 대한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으로 우리에게 부여하였다.
내가 자주 드나들며 노래해야할 대상은 무엇인가? 휘트먼은 myself를 그 다음 단락에서 표시한다.
I loafe and invite my soul,
I lean and loafe at my ease observing a spear of summer grass.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招待합니다.
나는 기대어 빈둥거리며 편하게 여름 풀잎의 눈을 관찰觀察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대한 자신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해야하는가? 휘트먼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위를 언급한다. 빈둥거리며 다름아닌 자신의 영혼을 초대하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바쁘다. 자신이 몸과 정신을 혹사 할 만큼 바쁘다. 그런 우리에게 휘트먼은 하던 일을 멈추고 빈둥거리라고 말하다. ‘빈둥거리다’를 의미하는 동사 loafe는 어원이 불분명하다. loafe는 우리가 목숨을 바쳐 일하는 재화를 상징하는 ‘빵’을 의미하는 단어인 loaf와 우연히도 유사하다. 우리는 loaf를 얻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일한다. 정작 자신이 돌봐야 할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일에 생계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매달린다.
휘트먼은 우리에게 유명한 철학자이 문필가를 모셔 귀동냥하지 말고, 자신의 영혼을 정중하게 초대招待하라고 조언한다. ‘빈둥거리기’는 몸을 움직이는 행위다. 책상에 앉아 독서하거나 글을 쓰는 혹은 고상한 철학이나 교리를 토론하지 말고, 산책을 나가 자연을 가만히 응시하는 훈련이다. 내가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태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동안 잃어버렸던 ‘영혼’이다. 산책은 나로부터 떠나갔던 영혼을 소환하는 일이다.
산책자는 가던 길을 멈췄다. 그리고 풀밭에 누었다. 편하게 빈둥거리며 여름 풀잎의 눈을 관찰한다. 풀잎은 전이의 상징이다. 누군가의 무덤위에 싹을 틔워 올라온 풀잎은 죽은 자의 원자가 부활한 변모다. 이 토양과 이 공기로부터 만들어져, 내가 노래를 부를 때, 오장육부에서부터 만들어져 입과 혀를 통해 부르는 노래로 등장한다. 내가 누워 여름 풀잎의 어린 싹을 관찰하는 이 땅은, 나의 부모와 조부모, 그 먼 조상에게도 모습을 주었다. 1855년, 휘트먼이 37살이 되던 해에 자신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는 죽기 전까지 이 노래 부르기를 멈출 생각이 없다.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은, 그 허전함과 그 심리적인 불안감을 채우기 위해 종교와 철학은 의존한다. 종교와 철학뿐만 아니라, 우리가 학문이라고 부르는 배움은 각자 지니고 있는 개성을 발굴하고 발휘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것들은 우리와 똑같이 발을 땅에 디디고 머리를 하늘에 둔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오랜 수련과 동료 인간과 생물에 대한 연민을,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이며 운명적인 조건 아래서, 기록으로 남긴 유물들이다. 이것들을 만든 창안자자 그 사상은, 신봉의 대상이 아니라, 나만의 노래를 신나게 부르도록 북돋는 반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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