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겟세메마네 동산 기도>
라파엘 (1483–1520)
유화, 1504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21.11.16. (火曜日) “잠”
(<신곡: 지옥편> 제 1곡 10-21행, 원문번역과 해설)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시점이 오면, 가는 장소가 있다.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고요히 경청하는 장소다. 예전에는 거대한 산, 강물, 혹은 동네 큰 나무가 그런 장소였다. 자연의 신비한 운행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 곳에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자기자신이라는 빛을 발견한다. 그 빛은 대중에서 당혹감이자 감동이다. 그 빛은 진리를 근거 없이 독점해온 학교나 종교에게 당혹감이며 모독이다.
예수는, 30살이 되었을 때,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는 ‘사랑’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각성은 목수일로 연명하던 예수를 동료 인간들의 깨우침을 위해 사는 구도자의 길로 인도하였다. 당시 그런 각성을 요단강에서 촉구하는 예언자가 있었다. 요한이다. 예수는 그에게 가서, 물세례를 받는다. ‘물 세례’는 요한이 만든 의식으로, 과거의 나와 결별하여 미래의 나로 이주하는 경계에서 결단을 촉구한다. 물은 오랫동안 신화와 전설에서 인류에게 혼돈과 정화를 상징이었다. 어머니 뱃속과 같은 물속은 생명유지의 필수요건인 숨쉬는 것을 불편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수세자가 그 물로 잠수한다는 것은, 오래된 자아를 혼돈 속에 강제로 집어넣고 숨을 거두어, 죽게 만드는 폭력이다. 요한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그 원래 자신을 회복하라고 외쳤다.
세례요한이 외친 ‘회개하다!’라는 그리스어 원문은 ‘메타노이에테’metanoiete다. 이 단어의 의미는 ‘마음을 바꿔라; 정신 차려라!’다. 엉뚱한 이론이나 교리, 혹은 우연히 알게 된 지식을 기반으로 엉뚱한 인생을 살지 말고, 원래 자신이 되어야할 자신을 회복하라고 외친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가 행할 새로운 세례는 물이 아니라 ‘영과 불’을 가지고 행해질 것 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가 10년동안 산에서 수련한 후, 영혼과 불을 가지고 하산하였다고 기록한다. 예수는 일생, 사람들에게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품으라고 말했다. 그 불은, 신이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에게만 부여한 자신의 숨결인 ‘영혼’이다. ‘영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프뉴마’pneuma는 히브리어 ‘루아흐’ruah의 번역이다.
예수는 인간들에게 누구나 신의 지문인 ‘루아흐’를 품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특히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이 없어지거나 줄어들까봐, 예수를 로마제국에 고발하여 처향당하게 만들 계략을 꾸민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공적公敵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다. 위대한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매일 듣고, 그 소리에만 복종했다. 예수는 이 영적인 지문의 내용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카마마조프의 형제들> 5권에 등장하는 이반은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대심문관’에 관한 이야기다. 이반은 이제 막 수사가 된 동생 알렉세이에게 신학적으로 도전한다. 16세기 스페인 한 마음에 살고 있던 대심문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갑자기 예수가 강림하여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대심문관이자 추기경은 병든 사람을 고치는 그를 체포한다. 그는 밤에 예수를 찾아가, 그가 행하는 기적은, 당시 교회가 하는 선교와 정반대라고 말한다. 특히 인간은 자유의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교회는 예수의 자유의지와 개성을 존중하는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수정하여, 오래전에 ‘교리’로 대치하여, 안정, 안심, 확신, 축복을 설교해 왔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빵을 원하고, 예수처럼 일상에서 선행하는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루살렘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은 슈퍼맨을 희구한다. 교회는 지금 예수를 대신하여 권력을 쥐고 사람들을 안심시킨다고 말한다. 대심문관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탄의 혜안이며, 교회가 로마제국을 정복했기 때문에, 예수가 할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예수를 나무란다.
복음서에 등장한 예수는 대심문관이 말한 예수가 물론 아니다. 그는 자유의지와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는 가르침 때문에, 자신이 대심문관과 같은 종교지도자와 로마제국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할 것이란 것을 감지하였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자신의 괴로움 심정과 흔들리는 확신을 신에게 기도할 참이다.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는 두려웠다. 그래서 이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라고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져 신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런 기도를 하고 제자들에게 돌아오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단테는 이 장면에서 자신의 변화와 개선을 위해 지옥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생각했다. 그는 <신곡: 지옥푠> 제 1곡 10-21행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10 Io non so ben ridir com’ i’ v’intrai,
11 tant’ era pien di sonno a quel punto
12 che la verace via abbandonai.
10. 내가 그곳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나는 잘 설명할 수 없다.
11. 나는 그 순간에 너무 졸렸다.
12. 내가 진리의 길을 버렸기 때문이다.
13 Ma poi ch’i’ fui al piè d’un colle giunto,
14 là dove terminava quella valle
15 che m’avea di paura il cor compunto,
13. 내가 한 언덕의 아래에 도착했을 때,
14. 계곡에 끝나는 그곳이었다.
15. 그곳은 나의 심장을 공포로 꿰뚫었다.
16 guardai in alto, e vidi le sue spalle
17 vestite già de’ raggi del pianeta
18 che mena dritto altrui per ogne calle.
16. 내가 위를 응시하니 그 언덕의 꼭대기가
17. 그 행성으로부터 온 첫 번째 빛으로 수놓아졌다.
18. 그 빛은 모든 길에서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한다.
19 Allor fu la paura un poco queta
20 che nel lago del cor m’era durata
21 la notte ch’i’ passai con tanta pieta.
19. 그때 나의 공포가 좀 가라앉았다.
22. 그 공포는 슬픔으로 지낸 밤 동안
21. 내가 심장의 호수에서 지속된 것이었다.
(해설)
단테는 베드로처럼, 육체의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골아 떨어진다. 자신이 그 공간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11행에 등장하는 pien di sonno a quel punto 즉 ‘그 순간에 너무 졸렸다’에서 단테가 지옥여행을 시작한 시점과 그 배경을 추측할 수 있다. 단테는 <지옥편> 제21곡112-114행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어제는, 지금으로부터 5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그 날은 여기로부터 길이 파괴된 1266년이다.” 그날이 1266번째 성금요일이므로, 단테가 지옥여행을 시작한 날짜는 1266에 예수의 생몰년대인 33년을 더하면, 1300년이란 숫자가 나온다. 그 날은 1300년 4월 8일 목요일 저녁이다. 이 날은 흔히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 날로 기억하는 성금요일 전날인 소위 Maunday Thursday다.
예수는 자신이 당할 고통에 대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은 쿨쿨 잔다. 예수는 그들에게 ‘한 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라고 질책한다. 단테도, 성금요일 전날, 예수의 제자들처럼 자고 만다. 그래서 단테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너무 졸렸다’라고 기록하였다. 단테가 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진리의 길 la verace via’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이 ‘진리의 길’은 3행에 이미 언급된 ‘지름길’la diritta via다. 이 진리의 길은 시편 23절 3행에 등장하는 ‘의로운 길’이기도 하다. (animam meam convertit. Deduxit me super semitas justitiæ, propter nomen suum.)
단테는 지금 언덕의 아래(piè d’un colle)도착하였다. 언덕은 신이 거주하는 신성한 산mons Domini다. 다윗은 <시편> 24편 3행에서 ‘누가 주님의 산에 올라 갈 수 있냐?’(qui ascendet in montem Domini?"라고 외친다. <신곡>은 단테가 이 거룩한 산을 힘겹게 올라가는 여정이다. 그 산의 정상에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곳에 신의 현현인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산은 영적인 태양이다. 단테는 새벽이 다가오자, 그는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보고, 자신이 처한 미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순간에 단테의 심장의 호수lago del cor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 표현은 중세인들이 생각한 심장에 대한 평가다. 심장에는 피가 호수처럼 고여 있고 신체의 모든 부분에 배분된다. 동시에 심장은 다양한 감정이 생산되는 거대한 장소이기도 하다. 단테는 <신생> II.4.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에 나는 진실로 말했다. 내 심장의 가장 비밀스런 방에 거주하던 약동하는 영혼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In quello punto dico veracemente che lo spirito de la vita, lo quale dimora ne la secretissima camera de lo cuore, cominciò a tremare)
이 장면이 플라톤의 저작이라면, 이 시는 여기에서 마쳐야 한다. 플라톤의 <국가>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는 빛의 그림자만 어렴풋이 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관과 같다. 우리는 그림자를 실제라고 착각한다. 만일 당신이 지혜로운 철학자라면, 고개를 돌려 빛의 근원을 찾아 동굴 밖으로 나온다며, 당신은 진리를 깨닫게 된다. 동굴의 비유는 인간이 자신이 동굴 안에 있다는 무지를 깨닫고 진리의 세계, 철학의 세계가 있다는 지식에 관한 은유다. 바로 이 지식이 덕arete다. 이 지식은 당신을 구원할 것이며 지혜의 상처인 무지를 치료할 것이다. 무지는 지식, 교육, 배움, 그리고 철학이 치료할 수 있는 지혜의 상처다.
단테는 그런 철학적 사고가 헛된 약속이란 점을 알았다. 우리의 인생은 책, 철학적 사고, 신학적 교리보다 복잡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일 매일, 자신에게 감동적인 ‘천국’을 행해 한 걸음 한 걸음 정진할 때, 변화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단테는 철학과 신학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고 있다. 단테는 이 빛을 본 순간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그 빛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공포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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