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20.9.28. (月曜日) 매일묵상 “연옥煉獄”


COVID-19은 인류의 일상적인 활동을 유보시켰다. 인간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성취해왔다. 우리는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이란 직함을 부여한 원칙을 ‘문명文明’이라고 부른다. 문명이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우연偶然이 아니라, 인위人爲적인 노력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엮어 하나로 묶는 예술이다. 문명은 눈으로 보기에는 서로 배타적인 해(日)와 달(月)을 하나로 융합한 무늬(文)다. 사실 해와 달은 언제나 하늘에 동시에 떠있다. 해가 등장하면, 하늘에 떠있는 달을 잘 볼 수 없고, 해가 저물면, 달이 다른 별들과 함께 변화무쌍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문명을 가능하게 하는 소통의 도구가 문자文字다. 문자는 구성원들이 소통을 위해,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징象徵이다. 도시는, 만나면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인위적인 모임이지만, 자신들의 깊은 생각을 즉흥적인 말을 넘어선 이성적인 글로 표현하여 공동선을 지향한다. 문명의 가시적인 표현이 문자와 도시라면, 문화文化는, 그 공동체 안에 사는 인간들이, 당대방의 의견을 정중하게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자기절제의 발휘다. 나와 타인이 하나의 무늬로 변하는 과정으로, 그 핵심은 배려配慮와 자비慈悲다.

아침에 눈을 뜬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다시 잠에 들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간은 ‘움직이는 물건’ 즉 ‘동물動物’이다. 자신의 다리를 땅에 움직이지 못하게 박아 놓고,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식물植物과는 달리, 인간이 속한 ‘동물들은’ 항상 움직인다. 한 곳에 정착해 있기도 하지만, 먼 곳을 가지 위해 잠시 발을 뉘어 놓고 쉬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뉘였던 발을 일으켜 바닥에 땅에 발을 디디면, 하루가 시작된다. 인간은 자신이 의도한 목적지를 향해 매일 조금씩 전진하는 동물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이 아담에게 던진 첫 질문이 “너는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너는 네가 가야만 하는 곳을 알고 있느냐?” 혹은 “너는 지금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느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만일 내가 인생이란 마라톤을 달리고 있지만, 그 목적지를 모른다면, 그 인생은 낭패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이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헐떡이면 뛰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녀)는 “당신이 달려가니, 나도 덩달아 달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14세기 이탈리아 시인 단테는 종교를 교리의 시녀로 타락시킨 중세를 마리고하고 르네상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간은 외부로 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변모를 통해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묵상과 상상을 통해 자기변모의 공간을 창조하였다. 누군가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추상은, 인간 삶이 구현되는 구상이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건물들은 상상의 가감이 없는 표현이다. 청사진과 설계도가 없이 지어진 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테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장소를 ‘파라디소’paradiso 즉 ‘천국天國’이라고 불렀다. 천국은 축자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어떤 곳이거나, 인간이 일생 수련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이상적인 상태가 ‘천국’이다. 천국은 사후세계의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공간 개념을 초월한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천국을 간절히 원할 뿐만 아니라, 천국과 같은 품격을 지니도록 애쓸 때, 우리가 잠시 경험하는 황홀경이다. 인간이 천국 상태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에 처해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한다. 자기응시를 통해, 남들에게도 창피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수치를 파악하고 걷어 내야한다.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 유기하는 장소가 ‘인페르노inferno’ 즉 ‘지옥地獄’이다. 단테는 안내자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에서 욕심, 폭력 그리고 사기로 고통당하는 죄인들을 보면서, 자신 안에 남아있는 이 이기심을 파악하고 제거한다.

만일 인간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그 단점을 파악하여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면, 그는 지옥을 지나 ‘연옥’에 진입한 것이다. 단테는 ‘푸르가토리오’Purgatorio라는 단어를 이용한다. 이 이탈리아어는 단테 <신곡>에 등장하는 ‘인페르노’(지옥)과 ‘파라디소’(천국)의 중간에 위치한 장소다. 푸르가토리오는 한자로 ‘연옥’煉獄이라고 번역되었다. 사람들에게 연옥은 고통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장소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연옥’은 한 개인이 자기구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다. 한다디로 연옥은 ‘지옥’의 연장이 아니라 ‘천국’의 시작이다.

연옥은 실제로 죄인들이 고통을 받는 장소이면서, 모든 영혼들이 구원救援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변화變化와 개선改善의 장소다. 사람이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들어 올라가야한다. 연옥은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문지방이다. 연옥은 남반구에 있는 산으로 묘사된다. 단테는 연옥을 예루살렘의 정반대에 존재하는 섬으로 사탄이 타락함으로 만들어진 장소라고 상상하였다. 연옥은 천국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문이자 산이다. 연옥의 맨 밑은 전-연옥Ante-Purgatory, 그 위는 칠죄종과 관계된 일곱 가지 고통과 영적인 성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맨 위는 지상낙원이다. 연옥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애통해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삶을 상징한다. 단테는 등산하면서 죄의 본질, 선악의 구체적인 예들, 그리고 피렌체 정치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푸르가토리아’는 단어는 장소가 아니라 개념으로 시작하였다. 작 르 고프는 <La naissance du Purgatoire> (연옥의 탄생)이란 책에서 ‘프르가토리움’PURGATORIUM이란 명사를 1170-1180년 사이에 파리 시토회 수사인 페트루스 코메스터Petrus Comestor의 설교에 처음 등장한다고 말한다. ‘프로가토리오’는 ‘정화하는 불’이란 의미의 ‘푸르가토리우스 이그니스’purgatorius ignis라는 표현이 존재했지만, 장소를 의미하는 명사로서 ‘푸르가토리움’은 그의 설교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르 고프는 단테의 ‘푸르가토리오’는 연옥에 대해 중세기에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사상의 숭고한 결정판이라고 여긴다. 단테는 최근에 등장한 ‘프루가토리오’란 개념을 그리스도교 사후세계의 세 번째 장소로 고정시키는데 결정적이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장소가 아니다. 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연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옥은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입니다. 죽은 후에 정화의 상태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의 몸에 있는 불완전 찌꺼기를 제거합니다.” 단테가 지옥과 천국을 경계에 있는 연옥을 열어주는 첫 번째 인물로 로마 시대 정치가이지 철학자들 선택한다. 단테는 그 인물과의 만남을 <푸르가토리오> 1.31-39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31 vidi presso di me un veglio solo,

32 degno di tanta reverenza in vista,

33 che più non dee a padre alcun figliuolo.

31. 나는 내 곁에 노인이 홀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32. 그는 보기에도 존경할 만하다.

33. 어떤 아들로 아버지로는 감히 모실 수 없는 그런 분이었다.

34 Lunga la barba e di pel bianco mista

35 portava, a’ suoi capelli simigliante,

36 de’ quai cadeva al petto doppia lista.

34. 그의 수염은 길로 희끗 희끗했다.

35. 그의 머리카락처럼, 수염이 떨어져

36. 양 갈래로 가슴까지 내려왔다.

37 Li raggi de le quattro luci sante

38 fregiavan sì la sua faccia di lume,

39 ch’i’ ’l vedea come ’l sol fosse davante.

37. 네 가지 거룩한 별들에서 광선이

38. 그의 얼굴을 빛으로 장식하였다.

39. 그는 마치 태양 광선을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노인은 로마공화정 말기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우티카의 카토’Cato of Utica다. 카토는 스토아철학의 대가로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카이사르의 독재와 제정을 막으려고 애썼다. 카토는 파르살리스 전투Battle of Pharsalis에서 실패하자, 자신이 카이사르의 손에 잡혀 죽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로마 공화정에 보장하는 자유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느니, 차라리 자살을 선택한다. 영혼불멸을 찬양한 플라톤의 <파이돈>을 밤새 읽으며 자살했다.

37행에 등장하는 네 개의 빛줄기는, 정화와 승화의 삶을 위해 필요한, 지혜, 용기, 절제 그리고 정의를 상징한다. 카토는 ‘연옥’입구에서 인간에게 올가미를 씌워, 신적인 자유를 구속하는 죄를 정화하려는 이간을 독려하는 영혼이다. COVID-19은 인류에게 ‘연옥’이다. 새로운 인류세로 다시 등장하기 위해, 느닷없이 등장하였다. 자신을 돌아보고, 정상을 행해 등산하는 산악인처럼, 그(녀)의 상승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짐들을 벗어던져야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힘들지만, 시도할 만한 유일한 길이다. 이 기간이 힘들지만 인류가 새로운 인간으로 도약하기 위해, 군더더기들을 제거하는 ‘연옥’의 시간이 되면 좋겠다.

사진

<연옥에서 등산하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카토가 단테에게 어떻게 지옥을 탈출했느냐고 묻는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묻는 자가 로마 정치가 카토란 사실을 금방 알아차린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그가 ‘연옥 산’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몸을 청결하게 씻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갈대를 꺽어 단테의 얼굴을 씻어준다.”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