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체의 마술사인 화가 샤갈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인간이 지녀야할 희망을 화려하면서도 원초적인 색으로 표현한 예술가다. 벨라루스 빕테스크 유대인 정착지에서 태어난 샤갈의 삶을 고통과 치욕의 연속이었다. 그는 어떻게 역경가운데, 그런 찬란한 색채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것일까? 그의 그림은 누구나 좋아하는 쉽게 다가 갈수 있는 그림이다. 내가 샤갈을 만난 것은 1980년대 말 미국유학시절이다.
나는 서양 고전어에 심취하여, 고전 히브리어가 속한 셈족어를 전공하였다. 고전어와 고전들이 가져다주는 일상의 기쁨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박사학위를 쓰면서 셈어 뿐만 아니라 인도-유럽어들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고전들, 특히 종교의 고전들인 경전에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성서, 꾸란, 탈무드 등을 읽었지만, 고전 히브리어, 아랍어, 아람어, 그리고 그 이전에 오리엔트 언어들인 아카드어, 고대 페르시아, 산스크리트어, 이집트어 등을 공부하면서, 경전을 읽는 재미도 더했다. 원전으로 경전을 읽으니 검은 색을 칠한 안경을 벗은 느낌이며, 흑백TV에서 칼라TV로 바꾼 느낌이었다.
나의 경전읽기는 지난 30년 동안 진행되었고, 매우 만족할 만한 나만의 에덴 도서관을 구축하고 있었다. 나의 석사 과정 때 지도교수는 유대인학자인 존 레벤손Jon Levenson이었다. 그가 개설한 <탈무드> 수업을 들으며, 창세기 이야기에 대한 랍비들의 다양한 해석을 알게 되었다. 샤갈의 성서 그림은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추월적인 해석이다.
샤갈 성서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신비주의인 ‘카발라’를 이해해야한다. 카발라의 신 경험은 순간적이며 직접적이다. 정통 유대교에서 신은 토라와 토라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을 습득을 통해 이해할수 있지만, 신비주의 카발라에서는 신이 이미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카발라는 신과 인간 사이의 교감을 히브리어로 ‘데베쿠스’Devekus라고 불렀다.
인간은 언제나 마음속에 신이 편재한다는 것과 그와 함께 한다는 것, 신은 어디에나 널리 퍼진 가장 미묘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심지어 물질적인 것들을 보고 있을 때 실제로는 그 안에 편재한 신성의 형상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삼라만상 안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이 샤갈을 종교다원주의자로 변모시켰다. 그에게 개별종교란, 자신의 역사적이며 운명적인 만남의 산물이며,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신에게는 유일한 통로이지만,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겐 그들에게 알맞은 통로가 있다.
샤갈은 특정종교의 가르침이나 사소한 교리에는 관심이 적었다. 대신 그런 가르침이나 교리에 생명을 불어 일으키는 핵심이 무엇인지에 관해 고민했다. 샤갈은 성인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그는 화가로서, 신학적인 혹은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샤갈 자신은 시대에 속한 채 작품 활동을 통해 시대의 한계를 예술적으로 초월하려 노력하는 종교적 인간,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이었다. 샤갈은 자신의 방식대로 우주삼라만상을 신의 흔적을 품은 '거룩한 존재'로 만들려 노력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에게서 때로는 사랑으로 가득한 그리스도교 성직자의 모습이나 유대교 랍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존재의 감수성들은 그의 그림을 통해 재현된다.
샤갈은 개별종교로서 유대교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교리나 신념의 내용이나, 자신이 속한 종교와 다른 사람들이 믿는 종교들과의 차이, 특히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샤갈은 모든 종교, 모든 사상, 모든 꿈, 모든 우주 존재는 그 안에 신적인 불꽃이 있어서 자유롭게 되어야 하며, 이 자유는 근본적으로 '완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샤갈은 뼈 속까지 다른 의미에서 '종교적인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이 표현에서 '종교'란 특정 종교가 아니라, '우주적인 종교' 혹은 '보편적인 종교'를 의미한다.
샤갈에겐 모든 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헌신이었다. 그는 절대적이며 숭고한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로운 신앙인이나 학자들을 흉내개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그 종교가 승화하려는 최상의 가치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샤갈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만물 안에 깃들어진 것으로서 종교적인 차원의 원초적인 사랑의 불꽃을 표현하는데 정교하며 또한 세심했다. 이 불꽃은 자기가 속한 유대교, 더 나아가 유대교 신비주이인 하시디즘과 카발라 전통의 가장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정신이었다. 그 어느 예술가도 샤갈처럼 특정 종교에 구속되지 않고, 기성종교를 초월하여 종교적 감정과 실재를 숭고하게 표현한 화가는 없다. 그런 면에서 샤갈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 불꽃을 담은 대상은 "인간 예수"였다. 이것은 유대주의 내부에서도 여러 종교성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종교혼합주의syncretism는 아니다. 만일 샤갈이 유대주의 내부의 교리적 마찰들을 염두에 두고 종교혼합주의적인 기반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샤갈이 이루어 놓은 성서 연작 작품들에서 반영되는 집중도와 반복적인 모티브들은 유기성을 지니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간 예수"의 상징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넘어선, 혹은 이 두 종교를 하나로 만드는 하나의 주제는 '고통'이다. 샤갈은 고통이다. 샤갈은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를 고통이라고 느꼈다. 만일 그가 고통을 몸소 경험하지 않았다면, 고통에 대한 심층적인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만물에서,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비참함, 한없는 고통, 그리고 인내를 보았다. 그는 연민의 정을 느꼈고 동정을 느꼈다. 그는 유대인으로 홀로코스트 유대인의 고통을 느꼈고 '유대인의 왕'INRI으로서 예수의 십자가를 인류의 고통의 상징으로 느꼈다. 그리고 샤갈은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들이 서로 사랑해야하는 당위성을 가르치는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샤갈은 그가 전통으로서 속했던 유대주의를 기반으로 십자가에서의 예수가 상징하는 것으로서의 인류가 지닌 내재적 고통의 외면화를 생각했으며, 작품을 통해 묘사했다.
샤갈은 일생동안 자신의 유대성과 예수의 이미지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였다. 특히 1915년 샤갈은 자신의 고향 벨라루스의 비텝스크에서 짜오슬쉐Zaolshe로 여행을 간다. 그의 저서진 [나의 인생]에 보는 그는 자신이 "예수의 창백한 얼굴"에 집착되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샤갈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에 매료되어 있었다. 샤갈은 아마도 유대인 예수는 당시 유대교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단아로서 예수가 자기와 유사하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샤갈은 편지와 인터뷰에서 종종 예수를 유대교에서 축출한대에 대해 실망했고, 시인으로서 예언자로서 예수에 매료되어있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예수 십자가 그림들을 그렸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단정적인 해석을 내릴 수 도 없다. 샤갈이 해석하는 예수의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있다.
1938년 11월 9일 소위 크리트탈나흐트Kristallnacht, 즉 나찌가 본격적인 유대인 박해를 시작할 때 프랑스에 있던 샤갈은 자신의 "게르니카"Guernica"를 "하얀 십자가 사건"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여기에서 순교당한 예수는 허리춤에 유대인 기도 숄을 묶어 나찌 치하에서에 고통을 받는 유대인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예수의 머리위에 명패이다. 십자가상 예수의 머리 위 명패는 라틴어로 INRI, 즉 IESVS·NAZARENVS·REX·IVDÆORVM의 약어로 "예수,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이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MARC CH"로 그려져 있다. 샤갈 자신이 예수와 같은 삶을 동경했는지 모른다. 샤갈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예수의 헌신에 촤고의 존경을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이름 밑에는 “유대인들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아람어로 기록하였다. 샤갈은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처형으로 표현한 것처럼, 사랑을 자신의 그림을 통해 표현하였다. 자신이 신봉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진
<하얀 십자가 처형>
러시아 유대화가 마크 샤갈 (1887-1985)
유화, 1938, 154.6 × 140 cm
시카고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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