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하루는 다른 인간으로 변모하기 위한 수련장이다. 지난 10년간 아침에 눈을 뜨며, 어제 밤에 침대에 들었던 똑같은 존재가 나를 기다린다. 그 존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본능, 그리고 과거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작되어 ‘나’라는 정체성이다. 내가 이른 아침에 발견한 ‘나’는, 응석의 대상이 아니라 탈출과 혁신을 위한 발판이다. 내가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로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건방진 나’로 유기한다면, 나는 과거를 살고 있는 죽은 자다. 죽은 자는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썩은 냄새가 난다.
그 썩은 냄새가 진부陳腐다. 별것도 아닌데, 온전한 지신을 만들기 위해서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자기전시自己展示다. 자기전시는 내일 내가 될, 그리고 내가 되어야만 하는, 그리고 내가 될 수 있는 나를 위해 과감히 버려야할 창피다. 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람에겐 검은 띠가 목표가 아니다. 검은 띠는 더 완벽한 자신이 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부하다. 인간으로서 벗어 날수 없는 ‘너무나 인간적인’ 한계일 것이다.
새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다. 저 창공을 가르며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를 향해 가장 우아한 모습을 나른다. 그녀에겐 완벽한 비행을 위한 이 순간이 목적지다. 연어는 자신의 유전자 속에 있는 생명보존을 위해 거룩한 여정을 당연히 감행한다. 수 만 km를 헤엄칠 뿐만 아니라, 가파른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개울에 자리 잡고 있는 곰들의 공격은 자신이 선택한 여정의 일부다. 연어는 알을 낳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임무를 마친 후에 숨을 거둔다. 야산에서 흔히 보는 무명의 풀 한포기 혹은 웅장한 소나무나 잣나무도 그렇다. 중력을 거슬려 저 놓은 하늘을 흠모하며 매일 매일 전진할 뿐이다.
오늘을 통해 변화된 자신을 만들기 위해, 나는 네 가지를 수련하고 있다. ‘아침 명상’, ‘산책’, ‘매일묵상’ 쓰기, 그리고 흠모하는 현자와의 대화인 ‘독서’다. 아침 명상은 주제는 ‘오늘은 무엇을 하지 않을까?’다. 굳이 하지 않을 것은, 내가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경주하는데, 내 다리에 달리 무거운 모래주머니이며, 내 가슴에 달린 훈장이고, 내 머리에 올려 진 왕관으로, 타인이 나에게 부여한 것들이다. 내가 오늘 주어진 구간을 보람차게 마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발을 보호하는 튼튼하지만 가벼운 신발, 치장이 필요가 없는 간결한 운동복, 햇빛을 가리는 운동모자, 그리고 햇빛과 타인의 눈길을 솎아내는 선글라스다. 나의 구간완주에 필요가 없는 다른 것들을 하나 생각해내,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명상이다.
정신, 몸, 그리고 영혼은 하나다. 이 셋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이자 나머지를 건강하게 보존하는 것은 몸이다. 서울로 이사 온 후, 지난 한 달은 산책길을 모색하고 나의 매일 루틴으로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샤갈-벨라를 데리고 서울 한복판에서 산책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아이들을 태우고 아무도 오지 않는 야산에서 가서 등산을 시작하였다. 산을 오르기 때문에, 예전보다 아이들도 나도 더 건강해졌다. 산책은 몸을 움직여, 나의 정신을 맑게 해주고 영혼을 일깨워주고, 하루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는 스승이다. 교육은 지덕체智德體가 아니라 체덕지體德智가 되어야한다. 자신이 정한 매일 운동을 통해 자연과 자신을 관찰하면, 이기적인 인간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떠오른다. 덕德이란 그런 자연스런 마음이다. 인류의 성현들은 이 덕德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지혜智慧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나는 인간을 개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일기日記’라고 판단하였다. 일기는 어제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 경계에서 자신에게 바라는 정중한 부탁이다. 나에게 ‘매일묵상’은 종교다. 며칠 밀리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책상에 앉아 몰스킨 수첩에 산책을 통해 얻는 단상을 만년필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적는다. 그리고 그 초안을 컴퓨터 스크린에 옮기기 시작한다. 내가 도산공원 앞에 마련한 ‘코라채플’Chora Chapel에서 진행할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인 ‘사브라임’의 중요한 목적인 ‘매일일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젊은이다. COVID-19 때문에, 서브라임은 2021년 3월에 개원할 예정이다.
독서讀書는 인생이란 항해를 의미가 있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나침반이다. 특히 경전과 고전은 그것을 사랑하고 깊이 읽는 사람에게, 심오한 의미를 조금씩 알려주는 요술램프다. 승화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매일 매일 조금씩 읽는 책이 있어야 한다. 고전과 경전에 담긴 말들은, 그것을 기록한 저자의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나 괴테에게 영감을 준 어떤 존재의 신의 지문指紋이다. 독서는, 지금-여기에 사는 나를 위한 가장 적절한 삶의 지침을 준다.
‘나’라는 인간이 ‘더 나은 나’로 변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을 50살이 되던 해인 2011년에 스스로에게 던졌다. 나의 고민은 ‘내가 변모할 수 있을까?’였다. 나는 각자 인간의 유전자가 다르듯이, 자신에게만 어울리는 적합한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길이 있다고 믿는 것이 깨달음이며, 목적지는 보이지 않지만, 그 길 위에 감히 나서는 용기가 믿음이다. ‘더 나은 나’가 존재하고, 그런 것을 발견하고 발굴하며 발휘하는 안내서는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여. 그것을 네 권의 책을 <위대한 개인> 시리즈로 출판하였다.
<심연>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를 강제로 고립시키려는 첫 번째 단계다. 개인은 ‘심연’이라는 장소와 시간을 통해 고독을 연습하여, 짧은 인생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고유한 임무가 무엇인지 깊이 숙고한다. <수련>이란 자신 알게 모르게 습득한 생각과 언행을 수정하는 과정이다. 요가수련을 위해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것들을 가만히 보고, 당연히 그래야할 모습으로 고친다. 숨쉬기, 바로 걷기, 가만히 앉아 있기, 허리를 올바르게 펴기를 다시 배우고 익힌다. 수련은 자신을 ‘없음’을 되돌리는 분투다. <정적>이란 오랜 수련을 거쳐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정중동靜中動’이다. 무용가 마싸 그레이험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멈춘 영원한 순간이며,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대상을 응시하여 마음, 눈, 그리고 렌즈를 응시한 결정적 순간이다. 인간은 이 영원하며 결정적인 순간을 통해 온전히 새로운 인간이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제 출간한 <승화昇華>는 ‘정적’의 일부이자 유지다. 승화는 도달해야할 목적지가 아니라, 정적에서 겸손하게 유유자적하면, 발견하는 자신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상태다. 고체가 액체를 거치지 않고 기체가 되는 화학현상처럼, 승화는 인간을 아래가 아니라 저 높은 하늘을 행해 자신을 독려한다. 중력이라는 우주의 어머니는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생명은 풀이나 나무처럼 그 중력을 거슬려 하늘로 치솟을 때 자신의 모습을 구비할 때 태어난다. 네 권의 책은 28개 에세이로 구성되어있다. 이른 아침 10분 동안, 한 꼭지를 읽고, 그 개념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수용하여, 조용한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다.
사진
<승화>
Comentár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