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15.(水曜日) “발굴發掘”
눈을 뜨면 언제나 새날이다. 내가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는데, 먼 미래로부터 밀려온 시간과 공간이 나를 움켜쥔다. 시간은 저 강물처럼 하염없이 흘러간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항상 잡으려하면, 저 만치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도저히 잡을 수 없다. 손으로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 버리고 시멘트를 발라 거대한 댐을 만들어도, 아래로 흘러가려는 물의 욕망을 영원히 가둘 수 없다. 존재하지만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고 한참 뒤에나 머리에 생긴 흰 머리카락이 시간의 야속함을 알릴 뿐이다.
‘오늘’이라는 시간과 공간은 어제와 다르다. 아니 내가 인식하는 이 시공은 변화중이어서 종잡을 수가 없다. 나는 흘러가는 강물에서 떠다니는 낙엽처럼 부유할 것인가? 아니면 그 강물의 흐름에 휩쓸려 내려가지만, 두 발을 바닥에 디디고 내가 해야 할 한 가지를 깨닫고 시간을 잠시 멈출 것인가? 내가 정색을 하고 온 몸과 정신을 하나로 집중시킨다할지라도, 내가 하고 싶은 한 가지가 없다면 낭패다. 우리 인간들은 불행히도 이것이 없다. 간절히 하고 싶은 한 가지가 없다. 어려서부터 타인들의 인정에 목말라있어, 그들이 환호하는 일이 최선인줄 착각하고 추구한다. 사회는 그런 것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기 때문에, 그런 인기가 있는 일에 집중한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하십니까? 당신은 직업을 통해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이 질문은 난해하다. 어쩌다 우연히 택할 일을 일생의 과업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일에 중독되어 밤낮으로 노동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불편하며 근본적인 질문을 기억하지 않고 싶어서다. 그러기에 망각이라는 유용한 상자에 이 중요한 질문을 감금하여, 더 이상 자문하지 않는다. 자신이 현재의 직업을 왜 선택했는지 알 수 없다면, 그 직업을 통해서 이루려는 목적도 불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 명성 그리고 권력을 가장 중요한 트로피라고 주장한다. 부를 쥔 자는 현재 자신의 부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 부의 유전자는 더 많은 부를 가진 자와의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을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 부러워하기에, 그(녀)는 항상 빈곤하다. 명성을 누리면 누닐수록 자신은 초라해진다. 자신의 행복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찾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타인들의 장단에 맞추어 무대에서 춤을 추는 광대가 되기 때문이다. 자기성찰과 자기절제 없이 권력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불운이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을 다스릴 수 있다는 권력의 기본을 망각한 사람은, 그 자신과 그(녀)를 믿는 공동체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최악이다.
1950년대 미국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먼David Liesman, 나단 글레저, 그리고 루엘 데니는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이라는 책을 썼다. 미국사회의 변천과정을 다뤘지만, 인간의 성격과 그것이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을 다뤘다. 리스먼은 미국이란 사회의 변천과정을 다음 셋으로 구분한다. 전통 지향적 사회, 내부 지향적 사회, 타인 지향적 사회. 인류를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규범과 관습이 개인과 사회가 추종해야할 가치라고 생각했다. 전통이 그들에게 진리다.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를 조상으로 둔 미국인들은, 이 전통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였다. 19세기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된 ‘초월주의’다. 초월주의는 개인이 전통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양심이 마련해 준 개인의 잠재성을 발판으로 초월적인 자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초월주의적인 자아는 동시에 우주적인 자아임에도 불구하고, 왜곡되었다. 초월주의는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개인-성공주의로 변질되었다. 20세기 초, 자동차, 비행기, 그리고 대량생산을 통해 대중문화와 중산층이 등장하여, 이전의 전통 지향적 삶이나 내면 지향적 삶보다는 외부 지향적 삶이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외부 지향적 인간이 현대인들의 이상형이 되었다. 이들은 존경받기 보다는 인기를 통해 사랑받기를 원한다.
타인들이 원하는 삶에 맞추는 삶은 피곤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매 순간 달라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도 백인백색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선동적인 사람을 리더로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잔 캐인Susan Cain의 Quiet: The Power of Introverts in a World That Can't Stop Talking(조용: 말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내성적인 인간들의 힘)란 책은 충격이다. 그녀는 외향적인 삶을 요구하는 현대문화가 천재적인 사람들의 실력, 에너지 그리고 행복을 탈취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오늘날 인류의 혁신의 가져온 사람들을 연구하면서, 내부지향적인 인간형이 이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진단하였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가장 전통적이며 외형적인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내성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매일 밤,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갖추어 입고, 자신에게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그는 그런 삶의 핵심을 그리스어로 ‘아가쏘스’agathos즉 ‘선善’란 단어로 표현하였다. ‘선’이란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포괄적인 대답이다. 인간이 가장 원하는 그 무엇이다. 인간은 유용하고 즐겁고, 탁월하고 정직한 것을 원한다. 이 전체를 포괄적으로 표현한 단어가 ‘아가쏘스’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이 발견해야할 선의 장소와 그것을 발견했을 때 취해야할 태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Ἔνδον σκάπτε
당신의 내면을 발굴하십시오.
ἔνδον ἡ πηγὴ τοῦ ἀγαθοῦ
당신의 내면엔 선이라는 샘물이 있습니다.
καὶ ἀεὶ ἀναβλύειν δυναμένη, ἐὰν ἀεὶ σκάπτῃς.
당신 항상 그 샘물을 퍼낼 때, 그 샘물은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명상록> VII.59
내가 곡갱이를 손에 쥐고 발굴해야할 대상은 타인이 환호하는 그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이다. ‘내면’을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 ‘엔돈Ἔνδον’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을 짓는 ‘경계안쪽’, 즉 ‘내 자신’이다. 엉뚱한데서 삽질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개간하라는 명령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가장 좋은 것, 즉 ‘선’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선은 한번 발굴하면 고갈되는 세상의 권력이나 부와는 다르다. 한없이 분출되는 무한한 물, 즉 샘물과 같기 때문이다. 이 샘물의 특징은 파면 팔수록 알 수 없는 저 땅속의 원천에서 물을 계속 분출해 낸다. 당신은 어디를 발굴하십니까? 당신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샘물의 원천을 찾으셨습니까?
사진
<로스코 채플>
미국 휴스턴, 1971
“로스코 채플은 1971년 미술애호가 존 메닐과 도미니크 메닐이 건축한 명상을 위한 초종교적인 건물이다. 2019년 2월, Architecture Research Office가 3천만불을 들여 개보수하여 다시 열었다. 특히 조지 섹스턴George Sexton이 추상 표현주의 화가 로스코가 원했던대로 천정유리에 루브르 박물관형식의 창을 달아 햇빛을 부드럽게 침투하게 만들었다. 뉴욕 69번가에 있었던 로스코의 마차차고 작업식의 미묘한 조명을 흉내 냈다. 방문자는 거대한 남청색 캔버스와 마주하여 자신의 내면으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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