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1(水曜日) 매일묵상 “고요”
배철현과 함께 해보는 수련
이윽고 2020년 하반기를 시작한 첫날 7월 1일이다. 로마황제 율리어스Julius 카이사르(기원전 100년-기원전 44년) 때문에 7월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줄라이’July가 생겨났다. 여성과 결혼의 여신 ‘주노’Juno의 이름을 딴 6월 ‘준’June과는 다르다. 한 시대를 풍미하다 장렬하게 암살된 인간을 추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7월, ‘줄라이’는 로마 장군, 정치가, 역사가로 오늘날 골지방 (이탈리아 일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정복하고 로마공화정을 제정으로 급변시킨 야심찬 인간이었다. 그의 독주와 독재는 장엄한 암살로 이어졌다. 카이사르는 일 년을 365일도 구별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어 시간과 계절을 정비하였다.
오늘은 일 년의 반이 끝나면서 동시에 반이 시작했다. 순간은 언제나 끝과 처음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 끝과 시작의 영원한 반복이 시간이 되고, 하루, 한 달, 일 년 그리고 인생이 된다. 나는 2020년 하반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나를 몰입시킬 한 가지는 무엇인가? 주저하는 나에게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조언한다.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확실한 몇 가지만 잡으십시오.
자신에게 되뇌이십시오.
우리 각자는 이 현재의 순간에만 삽니다. 시간의 한 조각입니다.
나머지는 지나간 과거이거나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명상록> III.10a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들은 순간을 산다. 비온 다음 날이면 그것을 확실하게 느낀다. 저 높은 산에서 흘러내려와 청평호로 유일되는 물살이 세다. 이리저리 굽이치면서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로 정진한다. 그 바쁜 개울가에 고니 세미리가 고요를 수련하고 있다. 혹여 지나갈지 모르는 잡어를 낚아 챌 참이다. 극도의 긴장과 안도가 고니의 몸에 배어있다. 고니뿐만 아니라 숲에서 노래하는 새들이나, 나무와 꽃 사이를 오가는 곤충들도 그렇다. 숲에서는 각자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 들어주는 이가 없어도 상관이 없다. 이들은 다른 새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적이 없다. 새들을 보면 떠오르는 상투적인 문구가 있다. “메아리 말고 목소리가 되십시오.”(Be a voice, not an echo) 새들 뿐만 아니라 유유자적하며 날아다니는 나비와 잠자리, 어슬렁거리며 바닥에 있는 모든 티끌들을 쓸고 가는 달팽이도 그렇다. 자연의 친구들은 순간瞬間을 만끽하기에 영원히 산다. 이들은 순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산다.
산책길로 들어서자 끝없이 펼쳐진 논밭이 나의 눈을 사로잡는다. 어떤 위대한 조각가나 화가도, 어떤 작곡가나 음악도, 이 고요한 정동중을 유지하는 논밭의 자태와 비교할 수 없다. 저 높은 하늘엔 아직 먹구름이 서성거린다. 멀리 겹겹이 서있는 산들은 비를 흠뻑 머금고 더욱 진한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원경, 중경, 그리고 근경의 산들이 다른 색을 입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착각하여 관찰하고 있다. 이들은 다가가면 더욱 짙은 색으로 변하는 신비다.
눈앞에 펼쳐진 셀 수 없는 벼들은 하늘을 향해 그 끝을 날카롭게 다듬었다. 승천하려는 간절한 생명의 의지가 자신을 그렇게 변모시켰다. 웅장한 생명의 합창이다. 오랜만에 만난 농부가 8월 15일경 이 풀잎 사이들에서 또 다른 벼들이 등장할 것이고 말한다. 이 풀잎들은 앞으로 낳을 벼들을 위한 전주곡이다. 그 후 또 본격적으로 40일간 장렬 하는 태양아래서 혹독한 훈련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추수다.
지난 4월에 15cm 정도 모종이었던 벼들이 천지개벽하면 변신한다. 한 알의 씨가 풀들을 내고, 풀들은 다시 속 풀들을 낸다. 한참 후에 낱알들을 머금을 수 있는 풀들이 솟나난다. 바람, 햇빛, 비, 공기, 안개, 물, 개구리, 거머리, 잠자리, 오리, 수많은 무명의 새들이 합세하여 쌀을 만들 것이다. 그 쌀은 가을이면 밥상으로 올라와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 살이 되고 피가 될 것이다. 오묘한 자연의 순환이다.
미국이 트럼프 정부아래서 전 세계의 조롱거리와 불쌍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리더의 무절제한 권력, 과욕, 그리고 이기심은 멸망의 전초단계다. 임기를 정해 리더를 선거를 통해 선출하여,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미국의 정신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월트 휘트먼(1819-92)이다. 그는 현대정신을 <풀잎>이라는 시집에 실린 ‘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라는 시에서 노래한다. 시인은 제 5단락의 시작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I believe in you my soul, the other I am must not abase itself to you,
“나는 너를 믿어, 내 영혼아! ‘이 다른 아이엠’은 너에게 굴복할 수 없어.
And you must not be abased to the other.
그리고 너도 ‘그 다른 (아이엠)’에게 굴복해서는 않되.
Loafe with me on the grass, loose the stop from your throat,
나와 함께 풀 위에서 빈둥거리며 놀자. 네 목에 있는 잠금장치를 풀어 봐.
Not words, not music or rhyme I want, not custom or lecture, not even the best,
내가 원하는 것은 말도, 음악도 시도 아냐. 그것은 관습도, 강의도
심지어 우리가 상상하는 최선도 아니지.
Only the lull I like, the hum of your valvèd voice.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목소리의 울림인 고요지.”
휘트먼은 자신의 영혼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 영혼이 신앙의 대상이다. 그는 이 영혼을 ‘다른 아이엠’the other I am이라고 부른다. 나를 구성하는 육체, 정신, 그리고 영혼이 ‘아이 엠’이고 내가 마음 속에는 ‘또 다른 아이엠’이 존재한다. 이 아이멤은 현재의 아이엠에서 승복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의 아이엠’도 ‘또다른 아이엠’에서 굴복하지 않는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이 다른 아이엠을 호출하기 위해, 목에 걸려있는 잠금장치를 풀어야한다.
심연에 존재하는 ‘아이엠’은 무엇인가? 근사한 철학자나 현자의 말인가? 혹은 천재적인 작곡자의 음악인가? 혹은 감동적인 시인의 운율인가? 혹은 사회가 정한 법률이나 도덕인가? 혹은 학자들의 재미있는 강의인가? 우리가 아는 문명과 문화의 최선도 아니다. 그것은 내 들숨과 날숨을 입을 통해 나오는 콧노래 소리다. 그것은 그 소리를 경청하려는 고요다.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와 풀잎 끝을 미세하게 흔드는 고요가 7월의 시작이다.
사진
<오늘 아침 풀잎들의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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