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부분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지식’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가짓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남아프리카에 가본 적은 없지만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존재를 ‘믿는다’. 내가 아는 새나 물고기의 종류도 몇 가지밖에 없다.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수십만 종 이상의 조류와 어류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 나는 새나 물고기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나는 태양계 안에 있는 다른 행성들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존재를 과학자이나 미국 NASA의 보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정할 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확실하게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테오리아(theoria)’라고 주장한다. ‘테오리아’는 인간 영혼의 가장 순수한 상태로 내가 알고자 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테오리아’는 ‘관조(觀照)’라고 흔히 번역된다. 피타고라스는 ‘테오리아’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예로 든다.
경기에 참여하는 운동선수들, 선수들에 돈을 거는 상인들, 그리고 경기를 있는 그대로 관람하는 관객들.
운동선수들은 경기를 통해 명예와 부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도구는 바로 ‘지혜(sophia)’다. 상인은 자신이 선택한 선수를 통해 ‘쾌락(apolaustic)’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경기를 있는 그대도 ‘관조(theoria)’하는 구경꾼이 있다. 이들은 경기에 몰입하여 ‘적극적으로 관찰한다’. 피타고라스는 이 관찰을 통해 얻는 지식만이 진리에 근접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너무 확실하여 의심할 수가 없는 그런 지식이 있는가? 이 질문은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이 그의 첫 저서인 <철학의 문제들>에서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겉보기에는 그렇게 어려운 질문처럼 보이지 않으나 대답하기 가장 힘든 질문 중 하나다.
러셀은 이 질문에 대한 쉬운 대답을 저해하는 장애물을 인식하는 것이 철학공부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철학은 우리 일상의 지식을 너무나 쉽게, 혹은 교리에 기초하여 단언적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관조를 통해 우리가 정말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현저한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만든다.
내가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나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 글을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고 창문 밖에 산과 태양을 본다. 태양은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지구보다는 훨씬 크고, 지구의 자전으로 태양이 매일 아침 떠오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내 방으로 들어온다면 그는 내 책상, 의자, 컴퓨터를 볼 것이다. 그러나 내 책상은 보는 사람마다 그 형태가 다를지 모른다. 그 책상은 직사각형으로 검은색 나무 모양이며 네 개의 다리가 있다. 햇빛이 반사되어 책상이 검은색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어떤 부분은 검은색이지만, 어떤 부분은 회색 같기도 하고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색을 띠고 있다.
책상 위 검은색의 분포는 내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 방으로 들어온 사람도 ‘검은색’ 책상을 보지만, 내가 책상을 보는 각도와 그가 보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빛이 반사되는 모양이 달라 그가 보는 책상의 색과 내가 보는 책상의 색은 엄밀한 의미에서 다르다.
내 책상은 ‘검은색’이라고 단정하면 이런 차이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이 책상을 명확하게 그리려는 화가에게는 그 차이가 중요하다. 화가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검은색’이라는 상식으로부터 벗어나, 책상의 진짜 색이 무엇인가를 탐구해야 한다.
러셀은 철학의 시작을 ‘겉모습’과 ‘실제’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무엇이 ‘책상’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어떤 이들은 책상을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울퉁불퉁한 표면을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현미경이 등장하면 일반 현미경으로 관찰한 책상은 그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책상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현미경으로 관찰한 책상을 신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오감에 기초한 지식을 믿을 수 없다. 책상의 모양도 그 실제 모습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그 모양이 진짜 모양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책상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책상의 모습은 달라진다. 그러므로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우리가 감지한 ‘겉모습’이 실제의 모양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종교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신앙(faith)’이다. 신앙과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가 ‘믿음(belief)’이다. 믿음은 종종 어떤 객관적인 진실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오감에 기초한 관찰로 시작한다. 더욱이 신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믿음은 이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지식 자체가 주관적이며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경험과 전통에 노출되었느냐에 따라 그 믿음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믿음이있다고 정의할 때 그 사람의 어떤 면이 그를 믿음을 지닌 자로 정의할 수 있는가? 종교인들은 흔히 반박할 수 없고 증명 가능한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종교적이라면 사람들은 그가 그 개별 종교에서 형성된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신앙과 믿음을 동일하게 여긴 것은 최근의 일이다. ‘신앙’이란 영어단어 ‘faith’는 원래 ‘신뢰’다. ‘신앙’이란 어떤 사람이나 이상적인 삶에 대한 신뢰이자 충성이다. 신앙은 지적이며 정신적인 활동이나 고백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내재된 일종의 덕(德)이다. 약속한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그것을 지조 있게 지키는 행위가 바로 신앙이다. 신앙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자기성찰과 수양의 과정이다. 신앙은 종종 의례와 이야기를 통해 배양된다. 객관적인 증명이 ‘진리’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은 도전이다. 인간의 삶에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이다.
사진
<버트란트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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