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과거의 환영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일 아침 얍복강을 건너면 무려 20년 만에 형 에서를 만난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를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틱스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고, 성서에서 요단강도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구분이다. 구약성서에서 홍해는 오합지졸과 광야 40년 생활을 감행할 신앙공동체를 분리시키는 격리다.
로마 장군 율리어스 시저는 루비콘강을 건넌 후, 로마제국의 절대지도자가 되었다. 얍복강은 요단강의 지류로 시혼과 옥이라는 지역의 경계이다. 얍복강은 야곱에게 지형적인 경계 이상이다. 얍복강은 야곱의 청년시절과 성숙한 어른과의 영적인 마지노선이다. 히브리어에서 얍복은 ‘씨름하다’와 어원적으로 같다. 이 신비한 강에서 야곱은 자신을 평생 동안 짓눌러온 오래된 자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영적 자아를 얻었다.
갑자기 어떤 낯선 자가 야곱과 아침까지 씨름을 했다. 그 낯선 자는 힘으로는 야곱을 제압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부러뜨렸다. 그 낯선 자는 “해가 떠오르니, 나는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나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자 그 낯선 자는 자신의 뼈가 상했는데도, 자신을 붙들고 있는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성서에 등장하는 신의 네 번째 질문이다. 그러자 그는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낯선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너는 신과 씨름하여 이겼기 때문이다.”
이름은 고대 오리엔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의 일부이다. 셈족어로 ‘shim-’은 ‘이름·기억·역사’라는 다양한 뜻을 지닌다. 고대인들은 신이 인간 각자에게 맞는 운명을 이름을 통해 알려주었다고 믿었다. 아브라함 종교들, 즉 기원전 4세기경에 등장한 유대교, 기원 후 1세기 그리스도교, 그리고 기원 후 7세기 이슬람교는 모두 셈족인들이 만든 종교다. 이들은 자신을 ‘셈’ 즉 ‘이름’의 후예라고 믿었다.
사막의 거친 환경에서 이들의 삶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신에 대한 ‘기억’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기 조상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기억’하여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신을 지칭하는 ‘신성사문자(神聖四文字)’인 ‘YHWH’를 ‘하쉠’, 즉 ‘(바로) 그 이름’이라고 부른다.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종종 신을 만난 후에,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야곱은, 내 이름을 개명해주는 이 낯선 자가 누군지 궁금하여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알 필요 없다면서 그 자리를 떴다. 급히 떠나버린 이 낯선 자는 누구인가? 야곱 안에 자리 잡은 과거에 사로잡힌 인간, 과거지향적인 인간, 야곱의 어두운 제2의 자아일 수도 있다. 야곱은 밤새도록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또다른 야곱과 씨름한 것이다. 야곱은 이 부정적인 자아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동적인 인간이었다.
형 그늘에 가려 사는 마마보이,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삼촌에서 속임을 당하는 소극적이며 우울한 인간이었다. 그런 과거를 극복하고 그는 미래의 새로운 비전을 보았다. 야곱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버틴다. 그는 더 이상 ‘발뒤꿈치’ 야곱이 아니라, ‘신과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이 되었다.
낯선 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성서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바로 ‘그 신’이었다. 성서에서 신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공중부양해서 우주선을 타고 서울시청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단순히 ‘어떤 사람’일 뿐이다. 성서에서는 이 신을 단순히 ‘이쉬’, 즉 보통 인간이라고 지칭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신은 커다란 건물을 세워놓고 그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사막한 가운데나, 신이 등장할 거라 전혀 예상치 못하는 장소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어떤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다.
우리가 신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정해놓은 시간과 장소에 신을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간 ‘세 명의 낯선 이들’이, 그들의 손자 야곱 이야기에서도 등장한다. 야곱은 이 낯선 자를,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신을 경외한다’는 문장은 우주 삼라만상에 신의 숨결이 숨겨져 있으며, 그 숨결을 찾아 ‘놀란다’는 의미다.
다음날 동이 트자, 야곱은 얍복강을 건넌다. 야곱은 엉덩이 뼈가 어긋나 고통을 느끼며 절뚝거리고 있었다. 강을 건너가보니 두 아내와 아이들이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 되지 않아, 형 에서가 건장한 청년 400명을 대동하고 그에게 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과 종 그리고 가축들을 둘로 나누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맨 뒤에 서게 했다. 이제 야곱은 맨 앞에 섰다. 그는 더 이상 뒤에 숨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야곱은 스스로 “신과 싸워 이긴 나 이스라엘이 누구를 대적하지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다가오는 에서 앞으로 나아가 그가 올 때까지 7번 정성스럽게 절했다.
야곱은 절을 마친 후 엉덩이가 아파 겨우 일어났다.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는 ‘붉은 머리’(에서는 히브리어로 ‘붉은 털’이란 의미)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그의 허리춤에 보기에도 섬뜩한 큰 칼이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에서는 야곱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고 고개를 떨군 채, 그에게 입맞추었다. 그리고 둘은 한참 울었다.
두 사람은 지난 20년 동안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데도 서로 원수로 여기고 지내온 자신들의 모습, 그리고 상대방이 감내했을 고통의 세월을 헤아리며 울었다. 상대방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는 ‘측은지심’의 상태로 들어갔다. 이 눈물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무아(無我)의 상태로 진입하여 상대방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그런 눈물이다.
에서는 야곱에게 “이 많은 사람과 같이 왔느냐?”라고 물었다. 야곱은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한다. 에서가 “필요 없어. 나도 재산이 많아”라고 하자 야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님, 제발 제 선물을 받으십시오. 형님의 얼굴을 보니 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신이 나를 좋게 보셔서, 형님이 나를 반갑게 맞이한 것입니다.”에서는 야곱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였다. 얍복강가의 경험을 한 야곱의 눈에, 원수 같고 두려운 존재인 형 에서가 지금은 신처럼 보였다. 야곱의 마음은 이젠 원수까지도 신처럼 보는 존재가 되었다.
야곱 이야기는 ‘발뒤꿈치’로 태어나 평생을 남의 눈치만 보고 살던 인간이 나중에 이스라엘이란 민족의 조상이 된 인간승리의 과정을 보여준다. 야곱의 승리는 자신을 믿고, 자신의 운명 그리고 인생의 고통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한다. 오래 참음이란 덕은 야곱과 에서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성격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으려고 14년 동안을 인내하면서 기다렸고, 아들을 얻기 위해 다시 5년을 기다렸다.
야곱은 부모와 형으로부터 떠나 20년간 방황했지만 신을 만나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이스라엘! 신과 겨뤄 신을 이기는 존재란 바로 형 에서를 만났을 때, 자신과 그리고 형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다. 비록 발을 절뚝거리는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그에겐 모든 사람을 신처럼 여길 수 있는 성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사진
<야곱과 에서의 화해>
벨리에 화가 파울 루벤스 (1577–1640)
유화, 1628, 331 cm x 282 cm
Schleißheim Stat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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